내 인생 최악의 여름은 1994년이었지만, 올해 1위 자리를 내주게 됐다. 단언컨대 2016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더웠다. 가뜩이나 높은 불쾌지수를 더 높여준 건 국민안전처에서 보낸 긴급재난문자였다. 물에 젖은 파뿌리처럼 지쳐갈 때쯤 요란한 진동음과 함께 문자가 날아온다. “폭염주의보(경보)입니다. 야외 활동 자제하고 충분한 수분 섭취에 유의하세요!” 일행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아이씨, 장난하나. 지금 더운 거 누가 몰라?” “보여주기식 행정의 정수!”
국민안전처는 ‘더위 알림처’였다. 누구나 몸으로 느끼는 한반도의 더위를 국민에게 문자로 알리고 또 알렸다. 폭염도 어쨌든 재난이다. 다 아는 정보일지라도 국가기관이 국민에게 알리는 일이 전혀 필요 없다 보긴 어려울 게다. 날씨정보를 이토록 열심히 알려줄 정도면 다른 재난이 터졌을 때 신속하게 문자로 알려주겠지, 하는 일말의 기대도 없지 않았다. 오래 걸리지 않아 그 기대는 처참하게 박살났다.
2016년 9월12일 저녁, 경북 경주 인근에서 근래 가장 큰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해당 지역 시민들의 일상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인터넷 곳곳에는 벌집을 쑤신 듯했다. 시민들의 현장 중계와 증언이 빗발쳤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국민안전처에선 재난문자가 날아오지 않았다. ‘국가 재난 주관 방송사’라는 KBS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정규방송을 계속했다. 친구와 가족의 안부를 물으며 한숨을 쉬고 가슴을 쓸어내리던 사람들은 끝내 분통을 터뜨렸다.
시간이 흘러 KBS가 특집방송을 시작했고, 먹통이던 국민안전처 홈페이지가 복구됐다. 이미 시민들의 마음은 싸늘히 식어버린 뒤였다.
국가의 이 압도적 무능을 보면서 사람들은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참혹한 비극을 겪고도 이 정부는 변하지 않은 것이다. 해경을 해체하고 국민안전처를 신설했지만, 이 국가는 자국민의 목숨 앞에 여전히 무능하다. 아니, 단지 ‘무능’이라 부르는 건 사태의 본질을 왜곡한다. 반복되는 무능은 ‘능력 없음’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어서, 능력이 부족해서 못하는 게 아니다. 안 해도 되니까, 하지 않아도 별일 없음을 확신하기에 뭉개고 내버려두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 (아니면 니들이 어쩔 건데?)”
지진은 그것만으로도 큰 피해를 주지만, 그 충격이 원자력발전소(원전)에 미치면 글자 그대로 ‘궤멸적’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익히 알고 있듯 일본 도호쿠 대지진이 그랬다. 많은 이들이 지진을 우려하는 것도 이 문제와 결부된다. 그런데 하필 이번 지진 피해 지역 부근에 대한민국 원전이 전부 몰려 있다. 2021년 준공되는 신고리 5호기, 2022년 준공되는 6호기를 포함하면 총 16기가 존재하게 된다. 원전은 자칫 재앙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입지 선정에 신중하기 마련이다. 지진 발생 가능성이 높은 곳이라면 당연히 피해야 하고, 관련 정보는 지역 주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원전 건설에 반대하건 찬성하건, 이 말엔 동의할 것이다. 그게 현대 민주국가의 상식이니까.
최근 더불어민주당 문미옥 의원이 입수한 정부 보고서는 그 상식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앞에서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경주와 부산 원전 단지 인근에 최대 강도 8.3의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활성단층이 존재한다는 연구보고서가 나왔음에도 정부는 이를 비공개 처리한 뒤 원전 건설을 강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온 나라가 세월호’라는 것은 비유가 아니다. 팩트다. 만약 지진의 충격파가 조금만 더 컸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지진의 충격파가 원전을 직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이다.
‘더위 알림처’가 지진이 난 뒤 재난문자를 늦게 보낸 것은 물론 문제였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이 국가가 국민의 생명에 직결된 사안을 은폐해왔다는 점이다. 요컨대 이 국가는 무능하다기보다 사악하다. 그 사악함은 엘리트들의 각종 이권과 사익에 의해 추동된다. 우리의 악몽이 ‘루프물’처럼 반복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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