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서울청사가 뚫렸다고들 난리다. 충격적인 일이다. 공무원들이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어느 ‘공시생’(공무원 시험 준비생)이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모든 보안을 뚫고 들어와, 대담하게도 시험 성적과 합격자 명단을 수정하는 어이없는 사태를.
정부 서울청사에 출입해본 경험이 있는 기자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거길 어떻게 들어갔지?” 그래서 언론은 잠시 내부에 공범이 있을 가능성을 상상했다. 이건 ‘음모론’이 만들어지는 전형적 과정이기도 할 거다. 결국 수사기관의 활약 끝에 우리는 다시 한번 어이없는 현실을 확인했다.
기껏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어이없이 무력화되는 사례를 우리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범인을 휴가에서 복귀하는 의경과 헛갈려버린 방호요원,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정문에 공무원증을 찍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다른 문에선 육안으로 확인하도록 해놓은 것은 왜인가? 체력단력실 로커에 자물쇠가 달려 있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벽에 적어놓은 걸 방치한 건 대체 왜인가? 그렇게 중요한 자료가 있는 PC에 CMOS·바이오스 비밀번호를 설정하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물음표를 4개나 찍었지만 답은 간단하다. 보안 시스템은 늘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격동의 세기를 살아온 장관님, 차관님이 PC를 바로 사용하셔야 하는데 비밀번호가 2개나 걸려 있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모든 문에 보안장비를 설치할 예산이 없기 때문이다. 체력단련실 로커를 납품받을 때 석연찮은 이유로 그렇게 됐기 때문이다. 청소요원들이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효율성이 언제나 원칙을 이겨왔기 때문이다. 결과가 해프닝에 가깝다는 걸 빼고 이게 세월호 참사와 다를 게 무엇인가?
한국인들에게 언제나 본질을 말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이번 선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다들 ‘최악의 선거’라고 한다. 정책 선거가 실종됐다고들 하는데, 원래 정책이 없는 선거는 없다. 출마하는 후보, 또 그들을 내세운 정당은 뭐라도 공약을 내놓기 마련이고 이는 충분히 진지한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이유는 이 나라의 모든 정치세력과 언론이 박근혜당 또는 노무현당이 표를 얻는 게 싫다는 것 말고는 도무지 투표할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그들이 너무 모자란 존재여서가 아니다. 그게 ‘편한 길’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이러는 거다.
예를 들면 새누리당의 ‘양적완화’ 공약에 대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반응이다. 강봉균 공동선대위원장을 두고 “머리가 몽롱해졌다”고 했다. 공약에 구체적으로 반박하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굳이 상대방을 폄하하고 토론을 거부한다. 삼성 미래차 사업부 광주 이전설을 ‘5공식 발상’이라고 반박한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에겐 “비정상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시시콜콜 반박하는 것보다 상대를 바보 만드는 게 쉽고 효과도 만점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 대통령선거는 쉬운 길만 선택한 정치가 초래한 재앙의 일단을 보여준다. 우리가 미국처럼 될 거라는 얘기냐고? 아니다. 우리 정치의 미래가 미국이면 그건 축복인 거다. 헬조선은 이미 망했다.
글·컴퓨터그래픽 김민하 편집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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