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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더스라는 ‘손가락’, 아니 아니 주먹 말고

등록 2016-02-23 16:27 수정 2020-05-03 04:28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편집장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편집장

안철수씨가 버니 샌더스의 ‘주먹’ 사진과 자기 ‘주먹’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며 ‘샌더스 닮은꼴’을 강변했을 때, 사람들은 웃겨서 쓰러지거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후 안씨는 “참 신기하게도 같은 용어를 썼다”며 힐러리 클린턴과 자신이 닮았다고 주장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웃지도, 주먹을 쥐지도 않는다.

미국 민주당 경선에 나선 버니 샌더스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흥미로운 촌극이 벌어지는 중이다. 현장인 미국이야 말할 것도 없다. 전설적 페미니스트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페미니스트 역시 언제든 성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해온 그녀는 ‘젊은 여성들이 샌더스를 지지하는 건 젊은 남성들이 샌더스 쪽에 많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 많은 이들을 경악시켰다. 젊은 여성 유권자들은 졸지에 정치의식 없이 남자만 쫓아다니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서로 돕지 않는 여성들을 위해 지옥에 특별한 자리가 마련돼 있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버니 샌더스라는 인물은 어쨌든 지금 미국에서 가장 ‘핫’한 노인이다. 그의 인생 역정은 전형적인 미국 정치 엘리트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그는 20∼30대를 ‘운동권’으로 살아가다 40살에 인구 4만 명 남짓의 작은 도시 벌링턴의 시장으로 당선됐다. 이후 30년 이상 같은 지역에서 시장과 상원의원으로 활동해오다가 70대 중반에 민주당의 유력한 경선 주자가 되었다. 이런 경로는 지금껏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마 샌더스 이후에도 재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 주류 언론과 명망가들이 ‘칠순 좌파’의 괴력에 당황해 갈팡질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오랜 세월 지역에서 주민과 믿음을 쌓아간 우직함이 샌더스 돌풍의 주춧돌이란 점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테다. 그러나 미국 전역을 뒤흔드는 신드롬을 지역 정치의 묵은 내공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풍부한 잠재력과 소통능력을 지닌 정치인이라 해서 모두 지금 샌더스 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건 아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끝끝내 ‘포텐’을 터뜨리지 못한 괜찮은 정치인이 어디 한둘인가. 왜 그들은 안 되는데 샌더스는 되는가?

많은 이들은 샌더스가 인기 있는 이유를 분석하면서 그의 ‘한결같음’과 ‘진지함’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지적한다. 물론 그런 면모들은 정치인을 보는 중요한 기준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인기를 모두 설명하긴 어렵다. 정치인 개인의 능력, 매력, 미덕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걸 넘어서는 결정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시대현실’ 말이다.

샌더스는 항상 똑같은 이야기를 해온 사람이다. 30대 때 하던 빈곤과 불평등 얘기, 40대, 50대에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오죽하면 선거에서 만난 상대가 “저치는 맨날 똑같은 소리만 한다”고 짜증을 냈을까. 지금 수백만 시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쏟아내는 좌파적 발언들은, 그가 스물 몇 살에 시골마을 연설회에서 아줌마 아저씨 두어 명 앞에 두고 긴장으로 덜덜 떨며 간신히 토해내던 말과 다르지 않다. 그는 50년 전에도 사회주의자였고, 지금도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한다. 그렇게 그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샌더스가 40년 넘게 한결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모순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오늘 유권자들이 샌더스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의 스타일 때문이 아니다. 메시지 때문이다. 지지자들은 샌더스의 주장 하나하나가 자신의 삶에 직결된 것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이 변두리 정치인이 말해온 문제가 공동체의 가장 절박한 과제임을 깨달은 풀뿌리들은, 냉소와 패배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고 더 많은 친구들에게 샌더스를 알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토록 견고하던 주류의 성채에 큼지막한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샌더스는 ‘행위자’(agent)이면서 동시에 ‘대리자’(agent)다. 샌더스는 손가락이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미국 사회의 비참한 현실이 있다. 시민들은 이제 샌더스와 함께 체제에 대한 분노를 공유하고 치열하게 토론한다. 버니 샌더스는 1941년에 태어났지만 오늘의 샌더스를 낳은 건 시민의 각성이다. 저 ‘오큐파이 무브먼트’ 이후, 아무래도 미국인들의 내면에 뭔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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