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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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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권력

등록 2015-06-30 15:51 수정 2020-05-03 04:28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막 유행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당시의 최고 권력자는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하지만 대체로들 강하게 부정했다. 아직 그것은 ‘가능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민주화라고 하는 사회적 흐름이 만들어낸 권력의 정점에서 비겁한 소리 하지 말라고 질책했다.
그 뒤 10년간 ‘시장’을 대변하는 기업의 질주는 아찔하다 못해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국가의 경제지표가 상당 부분 그 기업의 ‘실적’에 종속되었다. 그 기업이 쓰러짐은 곧 한국 경제의 패퇴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이 진담 같은 진담 아닌 진담으로 횡행했다. 어떤 이는 한국이라는 국가가 그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낮춘다는 말까지 해왔다. 그 기업의 최고 권력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 기업의 현재 권력이 1년여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때에, 착실히 승계 과정을 밟고 있는 미래 권력이 제법 깊이 그리고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사과는 강자의 몫이다. 권력은 확실히 시장으로 넘어갔다.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그 권력이 고개를 숙인 까닭도 가만 생각해보면 그것일지 모른다. 세계 초일류, 글로벌, 1등 기업을 자랑으로 삼던 집단이 정작 이렇게 무능하고 무기력하고 무모했단 점에 대한 사과였다. 그동안 행사해온 권력질의 양에 비해 그 실체가 너무 초라함에 대한 인정이었다. 강자의 몫을 인정한 것이다.

시장의 권력이 사과를 하자,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다른 한 곳을 향했다. 삼성은 사과를 했는데, 왜 청와대는 사과를 하지 않는가. 국민 4명 중 3명이 대통령의 사과를 원하고 있다.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조차 대통령의 사과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제라도 고개를 숙이라는 요구가 청와대를 휘감던 날,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국회’를 침공했다. 공교롭게도 6월25일이었다. 대통령이 국회법을 거부했다.

그냥 거부한 것이 아니다. ‘국회법’을 거부한 게 아니라 사실상 ‘국회’ 그 자체를 거부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여당 원내대표는 ‘일점사’당했다. 정치권은 순식간에 ‘경제 살리기의 발목을 잡는 집단’으로 전락했고, 국회법 중재안을 만든 입법부의 수장은 ‘저의를 의심받는 인물’이 됐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바야흐로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보여주는 우레성이었다.

‘권력은 정말 시장으로 넘어갔는가’라는 오랜 질문에 두 개의 답이 나온 한 주였다. 이재용 부회장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삼성이 뚫린 게 아니라 정부가 뚫린 것’이지만 기꺼이 대국민 사과를 할 수 있을 만큼 삼성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 됐다. 이 부회장은 그 사과의 퍼포먼스를 기꺼이 수용하며, 명실상부 삼성의 미래 권력이 누구인지를 현실에 과시했다. 권력을 둘러싼 경합은 끝났고, 이재용 체제의 삼성이 어떤 관용을 가질 것인지도 적절히 과시했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 깨닫지 못하겠느냐는 신경질을 부렸다. ‘배신의 정치’와 ‘선거’를 나란히 언급한 박 대통령의 짜증은 용상에 앉아 대감들을 향해 호통치는 나라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지금 이 나라가 ‘친박의 나라이냐, 비박의 나라이냐’고 묻는 대통령을 향해 이제 국민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차례인 것 같다. 민주화 이후에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왕정이 와서야 되겠는가.

김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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