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하루 앞둔 2023년 1월20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4구역에 불이 났다. 비닐과 합판으로 얼기설기 지은 집들은 불과 다섯 시간 만에 60여 채가 잿더미로 변했다. 빈집 20여 채를 제외하고 40여 가구 6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재민들은 최저기온이 영하 17도까지 내려간 설 연휴 동안 강남구청이 제공한 숙박업소와 화재 현장을 오가며 지냈다. 아침부터 눈이 내린 1월26일, 이재민들은 ‘구룡마을 화재민 비상대책위원회’ 천막에 모였다. 어두운 얼굴의 이재민들은 근심 가득한 이야기를 나눴다. 점심때가 되자 아직 성한 집에서 끓인 부대찌개를 천막으로 날라왔다. 마을 위쪽에 자리한 비상대책위원회 천막에서 내려다본 화재 현장은 굵게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였다. 하지만 타다 만 가재도구가 비어져 나온 주변으로 둘러친 노란 폴리스라인이 을씨년스럽게 늘어져 있다. 새로 짓는 고층 아파트단지가 더욱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1988년 형성돼 660여 가구가 거주하는 구룡마을에서 35년을 산 이재민 최아무개씨는 “매년 한두 번씩은 불이 났어. 마을 입구까지만 전기가 들어오고 거기부터는 주민들이 필요할 때마다 전기를 끌어가니까 전선이 어지럽지. 비 오는 날에는 여기저기서 스파크가 일어나”라고 말했다. 경찰과 소방본부는 누전을 화재 원인으로 보고 있다.
영상의 기온을 회복한 1월31일, 다시 찾은 구룡마을 현장은 눈이 녹아 화재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난방하려고 쌓아놓은 연탄이 무너져 불탄 가구들과 뒹굴었고, 타다 만 쌀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30년 넘게 이 마을에서 목회를 이끈 한 목사는 “저 안에 아직 쓸 만한 것도 있을 텐데, 겹겹이 쌓여 있으니 손댈 수가 없네”라며 탄식했다.
구룡마을은 재난이 반복되지만 뚜렷한 정비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도시정비사업을 추진하려 하지만, 보상과 개발 방식을 두고 주민들과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이러는 동안 화재 취약 시설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집과 가재도구를 모두 잃고 임시거처로 옮겼다가 마을로 돌아오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반쯤 탄 앨범이 뒹구는 잿더미를 바라보는 이재민들의 표정은, 타버린 것이 물건만은 아니라 말하는 듯 보였다.
사진·글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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