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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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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이 완전히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생명과 평화의 일꾼’ 고 백남기 농민 민주사회장

서울대병원에서 광주 망월동까지 2박3일, ‘망자의 천릿길’ 따라
등록 2016-11-16 21:29 수정 2020-05-03 07:17

헬리콥터가 날았다. 내려앉았다. 다시 날아올랐다. 떨어졌다. 11월4일 저녁 8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층. 한 아이가 무선 조종 헬리콥터를 갖고 놀았다. 헬리콥터는 1~2m를 오르다 떨어졌다. 그러기를 수십 차례. 건물 바깥에서는 노래 소리가 들렸다. ‘이소선 합창단’이 화음을 조율했다.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김남주 작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시인의 말이 날아올랐다. 노래는 별이런가, 올려다본 밤하늘이 반짝했다.

아이가 뛰었다. 아이는 웃었다. “와!” 헬리콥터가 떠오를 때마다 아이는 웃었다. 아이는 지오(4). 농민 백남기(1947~2016)의 손자. 아이의 등 뒤로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 영정 앞에서 큰절을 했다. 영정을 끌어안은 국화 무더기는 천사의 날개 모양. 영정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했다. 빈소 맞은편에서는 식사하는 사람들 소리, 왁자지껄. 음식 냄새가 넓지 않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생명과 평화 일꾼 백남기 농민 민주사회장’ 추모의 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장례식장으로 모여들었다. 아이는 선물받은 헬리콥터를 좋아했다.

11월4일 저녁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조문객들이 고 백남기 농민의 영정에 큰절을 올리고 있다. 지나가는 아이는 고인의 손자 지오(4).

11월4일 저녁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조문객들이 고 백남기 농민의 영정에 큰절을 올리고 있다. 지나가는 아이는 고인의 손자 지오(4).

20년 전보다 싼 쌀값

그런데, 모순일 것이다. 헬리콥터와 할아버지. 아이는 둘 모두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삶과 죽음 또한 그러하다. 농사일과 돈이 그러했다. 대통령은 산지 수매 가격으로 21만원(쌀 80kg)을 약속했다. 현실은 13만6천원. 지난달에는 12만9천원(통계청 발표 기준)이었다. 20년 전 가격이 13만3천원이다. 이건 아니다. 정부는 책상에서 농업인이라고 호칭했다.

‘백남기들’은 땅에서 농투성이 취급을 당했다. 아이의 할아버지가 상경한 이유다. 지난해 11월14일, 경찰의 살수(撒水)는 살수(殺水)였다. 경찰은 물을 뿌렸다고 주장하지만, 그 물은 사람 죽이는 물이었다. 1987년 6월 최루탄이 사람 잡는 총탄으로 둔갑했듯, 경찰의 물포는 총포와 다름없었다.

장례식장 들머리에서 손순호(59)씨를 만났다. 그는 그날 새벽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입국했다. 27년째 현지에서 한국식당을 운영하는 손씨는 지난해 11월14일 농민 백남기가 쓰러질 때 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경찰 차벽 바로 뒤였다.” 그에게 물었다. 농민 백남기는 누구인가.

“한국에서 보통 사람으로 태어나 성인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캡사이신 섞은 물대포에 비무장 노인이 쓰러졌다. 노인은 물줄기 속에서 줄을 잡고 있었다. 상징적이다. 역사의 줄, 생명의 줄 아닌가. 역사가 흐르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면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디스크를 앓는 허리에는 복대를 찼다. 그는 기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했다.

“물대포로 천추의 한을 품고 죽임을 당한 고 백남기님의 원골(怨骨)을 책임자 처벌과 특검으로 풀어주소서!” 망자의 고향인 전남 보성군 웅치면 주민들이 내건 펼침막이 펄럭였다. 밤 9시. 바람은 초속 2~3m, 기온은 섭씨 14도. 추모의 밤을 함께하려는 시민들이 장례식장 앞을 채웠다. 손에서 손으로, 촛불에서 촛불로 서로 불을 붙였다. 언제나 촛불은 연대다. 한 사람의 세월이 저무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촛불이 바람에 일렁였다.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김주온이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친구, 우리는 서로의 용기입니다.” 노동당 대표 이갑용은 소리쳤다. “싸우고 또 싸워서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살아 있음을 보이자.” 수백의 사람들이 외쳤다. “우리가 백남기다. 농민을 살려내라. 박근혜는 퇴진하라.” 망자의 후배 유영훈(장례위원회 호상)은 회고했다. “형님은 늘 검정고무신을 즐겨 신었다. 광주나 서울 갈 때도. 너도나도 덩달아 검정고무신을 신게 됐다.”

망자의 막내딸 백민주화는 편지를 읽었다. ‘나의 아버지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 울었다.

“(…) 아빠를 마지막으로 보고 한국을 떠났던 작년 여름 6월, ○○삼촌 정원에서 맛있게 삼겹살을 구워먹었었잖아요. 아빠는 지오를 웃겨주려고 꽹과리에 춤추면서 노래했었죠. 그날 밤, 늦은 시간까지 우리는 웃고 또 웃었어요. 그리고 난 우리의 그런 평범하고 소박한 행복이 당연히 오래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소소한 행복은 순식간에 처참하게 무너졌고, 사고 이후 당연하게 받아야 했던 사과는 1년이 다 되도록 받지 못하고 있어요. 당연한 것들이 전혀 당연시되지 못하는 세상에 아빠를 떠나보낸 것이 가장 한스럽습니다. 하지만 결국 진실이 승리한다는 것을 요즘 매일 실시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어요. 그 당연함이 완전히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끝까지 싸울게요. 억울함이 정말 억울할 수 있게, 그리고 미안함이 정말 미안할 수 있게, 그리고 그날이 왔을 때 이 슬픔을 어떠한 다른 감정도 섞지 않고 온전히 슬퍼할게요. 사랑하는 아빠, 걱정 말고 잘 가요. 이제 정말 그만 울고 씩씩하게 잘 살게요. 우리 모두의 기도 안에서 이제 편히 잠드세요.”

11월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고인의 민주사회장 영결식.

11월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고인의 민주사회장 영결식.

11월5일 오전 서울 종로구청 앞 네거리에 시민들이 담뱃불을 붙여놓았다. 이곳은 지난해 11월14일 고인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곳이다.

11월5일 오전 서울 종로구청 앞 네거리에 시민들이 담뱃불을 붙여놓았다. 이곳은 지난해 11월14일 고인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곳이다.

11월6일 오후 광주 망월묘지공원(5·18 구묘역)에서 고인의 아들 백두산씨가 부친의 유골함을 들고 있다.

11월6일 오후 광주 망월묘지공원(5·18 구묘역)에서 고인의 아들 백두산씨가 부친의 유골함을 들고 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

사람들은 다 함께 노래를 불렀다. ‘천릿길’. 바닥을 기어 천리를 간다. 망자의 의지다. 의지의 무게를 이제는 유족과 시민들이 짊어졌다.

한국 사회가 보내야 할 답장은 무엇인가. ‘경찰폭력에 의한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등을 위한 특별검사의 수사요구안’. 유족들은 이 법안의 약속에 기대어 장례를 치렀다. 10월5일 발의된 법안은 아직 국회 상임위원회 심사 단계에 멈춰 있다. 법안이 명시한 수사 대상이다.

‘1) 강신명 전 경찰청장이 2015년 11월14일에 있었던 민중총궐기에 대응하기 위한 타 기관과 서류 및 구두상 사전 협의된 내용 및 갑호비상명령을 발동하고 차벽을 설치하여 집회 시위 및 시민의 통행을 차단한 사건.

2) 2015년 11월14일 민중총궐기 집회 및 시위에 이용된 물대포를 규정을 위반하여 사용했다는 의혹사건 및 관련 인지사건.

3) 2015년 11월14일 민중총궐기 집회 및 시위에서 백남기 농민에 대해 규정을 위반하여 물대포를 직사하여 백남기 농민을 중태에 이르게 하고 결국 사망하게 한 사건 및 인지사건.’

11월5일 토요일 아침 8시 발인. 문규현 신부를 비롯한 가톨릭 사제 8명이 망자를 인도했다. 장례식장 3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지하로. 추락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목도하고 있는 시민들이 뒤따라 아래로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염수정 추기경이 집전한 명동성당 장례미사. 김희중 대주교(천주교 광주대교구장)는 말했다.

“우리 먹거리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바라는 고인의 외침이 살수대포에 의해 참혹하게 죽어야 할 정도로 부당한 요구였습니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국가가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습니다. 공권력의 부당한 사용으로 인해 천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생명이 죽었는데, 아직 공식적인 사과가 없는 처사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분이 책임지고 사태를 해결해주시기 바랍니다.”

명동성당을 나와 을지로2가~청계2가~종로2가~종로1가를 지나 종로구청 네거리까지. 운구 행렬은 소걸음이었다. 대나무를 깃대 삼은 만장이 펄럭였고, 교통 통제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있었고, 교통신호를 통제하던 경찰은 자주 허둥댔고, 외국 관광객들은 어리둥절해했고, 하늘은 쾌청하지 않았다. “국가폭력 끝장내자” “살인정권 물러나라” 내지르는 함성 아래로 누렇게 변색된 은행잎이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모순의 광장이었다. 오후 2시 광화문 영결식. 1만 명을 훌쩍 넘는 시민들이 광장을 메웠다. 식장 뒤편으로는 희한한 풍경. ‘2016 주한외국대사관의 날, 2016 대한민국 대한명인전’ 행사가 열렸다. 옥공예부터 화장품까지, 전통한과에서 식품들까지 천막이 빼곡했다. 거기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멀리 청와대 푸른 지붕이 잔뜩 찡그린 하늘 아래 보였다.

11월6일 낮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고인의 민주사회장 노제에서 만장을 앞세우고 운구 행진을 하는 시민들.

11월6일 낮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고인의 민주사회장 노제에서 만장을 앞세우고 운구 행진을 하는 시민들.

11월6일 오후 광주 망월묘지공원에서 엄수된 하관 의식. 부친의 묘에 흙을 덮는 큰딸 백도라지씨.

11월6일 오후 광주 망월묘지공원에서 엄수된 하관 의식. 부친의 묘에 흙을 덮는 큰딸 백도라지씨.

11월6일 오전 전남 보성군 보성역 앞 노제에서 한 주민이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11월6일 오전 전남 보성군 보성역 앞 노제에서 한 주민이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밥은 백성의 하늘”

광장 지하. 세종문화회관이 운영하는 전시공간이 있다. ‘세종 이야기, 충무공 이야기’. 들머리 문구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는 차라리 비현실적이다. 땅 위의 민중에게 땅 아래 문구는 허황된 것이었다. 망자의 뜻과 얼 ‘생명·평화’는 곧 상식과 정의이거니와 대통령은 귀를 닫았다. “중고생이 분노했다, 박근혜를 몰아내라”는 학생들의 종주먹질에도 대통령은 눈을 닫았다. 대통령의 발밑에서 뻗어나간 거대한 모순의 뿌리에 한반도가 결박된 형국. 쏟아지는 물포 앞에서 망자가 끝끝내 당겨서 풀어내려 한 줄은 바로 그 부정의, 불평등, 비민주의 결박 아니었을까.

정치인들의 말을 뒤로하고 망자는 남도로 향했다. 밤 10시 전남 보성군 보성장례식장. 고향을 떠난 지 358일 만에 망자가 돌아왔다. 주민들은 장례식장 앞 도로에 좌우로 도열해서 망자를 맞았다.

11월6일 아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 마을 이름이 부춘(富春)이지만 망자는 풍요한 봄을 맞지 못했다. 얼마 전 그의 밀밭에서 벗들은 다시 우리밀 씨앗을 뿌렸다. 망자의 집 마루 위에는 편액이 3개 걸려 있다. ‘保家孝友(보가효우), 欽崇天主(흠숭천주), 心淸事達(심청사달)’. 효와 우애로 집을 지키고, 하느님을 높이 모시며, 마음이 깨끗해야 일이 이루어진다. 주인 잃은 꽹과리와 채, 문고리에 걸린 노란 세월호 리본. 기자들이 바글바글했다. 개가 크게 짖었다. 마을 이웃 할머니가 망자의 영정을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으으으, 으이그, 워쩔 거나, 뭔 일이다냐 대체.” 할머니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울상이던 하늘은 남도에서 개었다. 보성역 노제를 마친 망자의 운구 행렬은 광주 금남로에 다다랐다. 시민 양동오(60)씨가 무작정 연단에 올라가 소리쳤다. “머뭇거리지 말고 올라오십시오. 용기가 있으면 올라오십시오. 뒤에 숨어서 하지 말고 올라오십시오. 하고 싶은 말도 하시고. 그렇게 안 하면 광주 시민이 아닙니다.” 1980년 5월 광주를 연상케 하는 주먹밥도 보였다. 가톨릭농민회 광주대교구 사람들이 손수 농사지은 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시민 5천여 명은 금남로 노제를 함께했다.

망자의 손자 지오는 연단에서 에 맞춰 어깨춤을 추었다. 망자가 생전에 손자에게 불러주던 노래다. 운구 행렬이 서방시장까지 2.5km를 나아갔다. 비닐로 만든 만장 25개가 마치 망자의 집 뒤 대나무숲인 듯 사각사각 수런수런 소리를 냈다. 서방시장 상인들이 도로로 나와 망자를 배웅했다. 채소를 팔던 할머니가 눈물을 떨궜다. 곁에 선 상인 김아무개(39)씨의 말.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이 쫓아내기 전에 물러나야 한다.”

광주 영락공원에서 화장한 주검은 오후 4시53분 망월묘지공원(5·18 구묘역)에 도착했다. 하관 예배가 천주교 의식으로 엄수됐다. 최루탄에 쓰러진 이한열, 경찰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절명한 강경대, ‘죽창가’의 투사 시인 김남주…. 망자는 민족민주열사들 곁에 누웠다. 망자의 묘 바로 아래편에는 지난해 9월 국가보안법의 차꼬에 시달리다 유명을 달리한 김형근 교사가 잠들어 있다.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 있는 고 백남기 농민의 집.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 있는 고 백남기 농민의 집.

이한열·김남주 곁에 묻히다

이제 농민 백남기의 주소는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285 망월묘지공원 제3묘원’. 그곳은 한국 민주주의의 도정에 놓인 ‘도로 원표’일 것이다. 오후 5시30분. 구름 사이로 통곡의 노을이 망월묘지공원을 비추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시민의 무기는 단 하나, 한 조각 붉은 마음(일편단심·一片丹心)일 것이다. 붉은 노을은 망자의 붉은 흙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눈이 붉었다. 날이 기울었다.

보성·광주(전남)=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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