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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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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로 태어나서

등록 2025-03-14 17:48 수정 2025-03-17 12:15
늦은 가을, 박정희가 태어났다던 집을 구경하고 돌아가다가 너희를 보았지. 오래전 평범했을 그 모습은 ‘이제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 있었어. 오늘날의 엄마 돼지들은 겨우 서고 앉을 수 있는 케이지에 갇힌 채, 새끼를 낳고 잠시 젖을 주고 다시 새끼를 배지. 평화로운 모습인데, 씁쓸하구나. 2017년 경북 구미.

늦은 가을, 박정희가 태어났다던 집을 구경하고 돌아가다가 너희를 보았지. 오래전 평범했을 그 모습은 ‘이제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 있었어. 오늘날의 엄마 돼지들은 겨우 서고 앉을 수 있는 케이지에 갇힌 채, 새끼를 낳고 잠시 젖을 주고 다시 새끼를 배지. 평화로운 모습인데, 씁쓸하구나. 2017년 경북 구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념일은 대부분 돈벌이와 관계 깊다.

모든 지구 자원이 그렇듯 돈 또한 유한하지만, 묘하게도 ‘돈벌이는 무한하다’는 신화가 깊숙이 스며들어 우리의 잔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준다. 달력에서 숫자의 모양이나 발음을 떼어와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기념일을 만들어 호들갑을 떠는 건 지갑을 터는 잦은 수법 중 하나다. 그렇게 해서 11월11일이 알게 모르게 ‘긴 초코과자의 날’이 됐고, 9월9일은 ‘구구 데이’가 되어 닭 먹는 날이 되었다.

3월3일은 무슨 날일까. 맛없는 얘기부터 하자면, ‘세계 야생동식물의 날’이다. 1973년 그날, ‘멸종위기 야생동식물종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이 체결됐다. 그 후로 40년이 흘렀지만, 오히려 높아가는 멸종위기를 경고하기 위해 2013년부터 유엔은 이날을 기념일로 선언했다. 2019년 유엔 생물 다양성 과학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약 100만 종의 동식물이 수십 년 내 자취를 감출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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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얘기를 하자면, 3월3일은 한국인이 정한 ‘삼겹살 데이’다. 어쩌다가 생긴 날일까. 2000년대 들어 구제역이 한반도를 휩쓸면서 돼지 수백만 마리가 영문도 모른 채 산 채로 구덩이에 묻혔다. 감염 돼지가 1차 살처분 대상이었지만, 근처에 살던 멀쩡한 돼지들도 예방적 차원에서 죽어야만 했다. 구제역은 전파력 강한 1급 가축전염병이지만, 치사율이 높지 않고 사람에게 감염되지도 않는다. 문제는 상품성이다. 산업화한 축산업에서 상품성 저하는 곧 돈의 곤두박질 아닌가. 사람으로 태어난 동물에게 체중 감량은 때론 축복이지만, 고기로 태어난 동물에게 체중 감소는 죽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구제역 청정국’ 지위를 지켜야 한다는 정부의 강박은 돼지들의 신속한 죽음을 부채질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수백 수천 마리도 아니었다. 수백만 마리였다. 날카로운 비명이 산하에 울리고, 검붉은 피가 오래도록 흙을 적신 ‘돼지 홀로코스트’였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한 방역 차원의 조처였다지만, 이런 살처분 방식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 논쟁이 불붙을 수밖에 없었다. 돼지들만 죽었나. 살길 잃은 양돈 농민이 목숨을 끊었고, 살처분 작업에 동원됐다가 트라우마를 겪고 생을 달리한 이가 있었다. ‘삼겹살 데이’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 육류 소비를 촉진하고, 양돈 농가를 돕자는 차원에서 기획됐다고 한다. 소박한 지역 행사에서 시작됐지만, 유통기업이 달라붙고 광고와 홍보가 잇따르면서 규모가 커졌다.

오늘도 돼지들은 여섯 달 만에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나고 자란다. 멸종위기종이 아닌 탓에 돼지 보호를 위한 국제협약 따위는 없다. 통계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인 한 명이 먹은 돼지고기는 평균 30㎏이었다. 우리 입에 넣기 위해 한 해 1900만 마리를 잡았는데, 여기에 수입육을 더하면 2500만 마리가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 많이도 먹었다. 참 많이도 죽였다. 참 많이도 벌었다. 어느 식당에서 보았던 문구가 떠오른다. “손님 여러분, 돈(豚) 많이 먹고, 돈 많이 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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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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