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가 일을 한다.
6월 땡볕 아래 초록 벼가 앞다퉈 자라느라 팔 벌리고 늘어선 전북 남원시 이백면 계산마을 들녘이다. 들판 한가운데 서서 사방을 둘러봐도 둥글둥글 부드러운 산자락이 온 동네를 감싸고 있다. 산의 이름은 ‘어머니의 품’ ‘어머니의 산’이라 불리는 지리산이다.
한낮 최고기온이 31℃까지 오른 2024년 6월21일, 시내에 사는 딸이 주말을 맞아 엄니를 찾았다. 엄니는 어머니를 부르는 이곳 지역어다. 차를 끌고 마을 어귀에 들어서던 60대 딸은 들녘에 엎드려 논바닥에 손을 찔러넣고 꼬무락거리는 엄니를 발견한다. 얼른 차를 세우고 논 가운데로 들어선다. 뒤이어 도착한 전주 사는 큰사위도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논으로 향한다.
올해 88살의 엄니는 잔뜩 성난 햇살이 좀 누그러진 늦은 오후 김매기(논이나 밭에 자생하는 불필요한 풀을 김이라 한다. 김을 뽑아 버리는 일)를 하러 집을 나섰다. 60리가량 떨어진 남원시 대강면 풍산마을에서 시집와 평생 해온 일이다. 뇌경색으로 몸이 불편한 남편을 대신하느라 안팎살림을 모두 독차지한 터다.
모를 심은 지 달포가 지나 피가 한창 자랐다. 피는 자랄수록 뿌리가 거세져 때를 놓치면 뽑기 어렵다. 오죽하면 옛 어르신들이 “피 다 뽑은 논 없고, 도둑 다 잡은 나라 없다” 했을까. 이 말을 곱씹으며 하루에도 몇 차례 논에 들어간다. 피를 한 움큼 뽑아 논두렁으로 던질 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올가을 풍작을 예약하는 기분이다. 자식들 입에 들어갈 찰진 밥알이 눈앞에 그려진다.
이튿날 새벽부터 이른 더위를 식히는 비가 내렸다. 마을을 둘러싼 산등성이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듯, 산자락마다 김이 무럭무럭 뭉쳐 올라 구름을 키운다. 800리를 돌아야 그 둘레를 다 돌아볼 수 있다는 지리산. 너른 치맛자락에 아이들을 주렁주렁 매달아 키운 엄니들처럼, 지리산은 산자락마다 온갖 짐승과 나무, 꽃 그리고 마을과 사람을 품는다.
산 아래 들녘에서 지리산 같은 엄니가 일하고 있다.
뱀꼬리: 엄니는 한사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사진·글 이정우 사진가
*낯섦과 익숙함, 경험과 미지, 예측과 기억, 이 사이를 넘나들며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시각적 자극이 카메라를 들어 올립니다. 뉴스를 다루는 사진기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한 이정우 사진가가 펼쳐놓는 프레임 안과 밖 이야기.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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