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쩔 수 없었어. 본능처럼 손바닥이 날아간 것을. 너는 에엥~ 하는 비명도 없이 무너졌지. 벽지에 피가 흥건하더구나. 그것을 네 피라고 불러야 할지, 내 피라고 주장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바라보았지.
거듭된 수청 요구를 거절하자 변사또는 춘향을 형틀에 묶어 고문한다. 몽둥이로 정강이를 때리는 ‘형문’은 회복 불능의 신체 손상은 물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앗을 수도 있었기에 한 번에 서른 대 이상 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 있었다. 춘향은 서른 대를 맞고서야 목에 칼을 쓴 채 감옥에 갇힌다. 무려 3년. 겨울엔 찬 바람과 눈보라가 들이쳤다. 여름이라고 나았을까. 변사또인 양 춘향을 괴롭힌 놈들이 있으니, 빈대와 벼룩과 모기였다고 <춘향전>은 전한다. 얼마나 가려웠을까. 상상만으로도 가려워 나는 긁기 시작한다.
빈대·벼룩· 모기· 머릿니는 오랜 세월 사람의 동반자였다. 어릴 적 우리 남매는 학교가 파하면 어머니 앞에 앉아 바닥에 종이를 깔고 머리를 내밀었다. 어머니가 참빗으로 머리를 빗길 때마다 후드득 종이 위로 까만 깨가 떨어져 꿈틀댔으니, 바로 머릿니였다. 당시 참빗은 모든 가정의 필수품이었다. 그땐 아무렇지 않았으나, 돌이켜보니 아연하다. 내 머리카락 숲속에서 벌레들이 피잔치를 열고, 교미하고, 알 까며 오순도순 살았다는 얘기 아닌가. 옛이야기와 속담에 빈대와 벼룩이 숱하게 등장하는 까닭은 그들이 우리와 매우 가까웠기 때문이다. 백성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건 탐관오리만이 아니었다.
녀석들을 몰아낸 건 화학합성제 디디티(DDT)였다. 절지동물에 대한 DDT 접촉독성을 발견한 공로로ㅍ스위스의 파울 뮐러 박사는 1948년 노벨생리학상을 받았다. 효과만점 살충제는 세계적 인기를 누렸다. 가정과 학교 같은 장소를 넘어 우리 몸 구석구석에도 DDT가 뿌려졌다. 옛 사진들을 검색하면 흰 가루를 뒤집어쓴 채 해맑게 웃는 이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빈대와 친구들’은 빠르게 사라졌고, 1980년대가 되자 인간은 이 전쟁의 승리자처럼 보였다.
해양생물학자 레이철 카슨이 쓴 <침묵의 봄>은 합성살충제의 생태계 교란과 파괴를 경고한 무서운 책이다. DDT는 퇴출됐다. 인간을 놀리듯 모기와 빈대는 내성을 갖췄다.
옛날 옛적에는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모기와 빈대도 특정 지역과 서식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녀석들이 옮기는 질병은 풍토병 수준의 ‘찻잔 속 태풍’이었다. 인간의 활동 반경이 크게 넓어지자 양상이 달라졌다.
‘타이거모스키토’라고 부르는 흰줄숲모기는 지카바이러스와 뎅기열을 전파한다. 고인 물에 알을 낳는 이 녀석을 전세계로 퍼뜨린 것은 재생타이어 산업이었다. 타이어에 고인 물을 이동주택 삼아 타이거모기는 온 세상을 여행했다. 사람 탓이다. 급증하는 빈대로 프랑스 파리가 골머리 앓는다는 뉴스가 나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서울에 빈대가 출몰하는 걸까. 설마 녀석들이 그 먼 길을 기어왔을까. 사람 탓이지. 흡혈충을 박멸하려던 사람들이 늘 녀석들에게 살길을 마련해줬다는 건 이 오랜 관계의 슬픔이다.
머나먼 루마니아의 고성에 산다는 드라큘라 백작이 뭐가 무섭나. 내 집에 사는 모기와 빈대가 나를 떨게 할 뿐이다.
사진·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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