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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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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고 싶었으나 못 잡은 간첩!

등록 2004-08-06 00:00 수정 2020-05-03 04:23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간첩의 추억(1)- 무시무시한 007 첩보전 이야기를 기대했으나 너무나 ‘시시했던’ 그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1999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 한동안 가장 많이 만난 사람들의 직업은 간첩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그들이 현직이 아니라 전직 간첩이었기 때문이다. 1999년 여름부터 1년여간 비전향 장기수들의 경험을 채록하면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꼭 한번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간첩들을 무더기로 만나게 되었다. 전직 간첩을 가까이서 보기는 훨씬 전에 재일동포 형제간첩단 사건의 서승, 서준식 형제를 만났고, 미국에 있을 때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나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의 배후로 간첩단 괴수로 몰린 서정균 선생이나 성낙영 목사를 만나기도 했으니 비전향 장기수 여러 분들을 만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북에서 내려온다는 편견을 버려라

전직 간첩을 여럿 만나보았지만, 비전향 장기수와의 만남이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이들 다수가 북에서 내려온 ‘순도’ 높은 남파 간첩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분들을 만나던 날, 나는 불운한 시대에 몹쓸 사람들 만나 간첩이라는 엄청난 감투를 쓴 ‘짝퉁 간첩’이 아니라, ‘오리지널’ 간첩을 가까이 서 보게 되어 잔뜩 긴장했다. 어린아이같이 천진한 표정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를 내오는 김인수 선생을 가리키며 최하종 선생은 짓궂은 표정으로 “나는 그냥 보통 간첩이고요, 저 양반이 진짜 무장공비라요” 하며 농담을 해서 내 긴장을 풀어주었다.

요즈음 갑자기 ‘간첩’이 때아닌 인기를 얻고 있다. 여야 대변인이 아니라 대통령과 야당 대표까지 나서는 국가 정체성 시비에서도 간첩이 육군대장을 조사하냐며 난리가 나 있다. 간첩! 음습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말이다. 얼마 전 김명인 형이 논단에서 ‘간첩의 추억’에 대한 글을 썼는데, 처음 글을 깨친 대여섯살 무렵, 국어교과서의 철수, 영이, 바둑이보다도 먼저 학습한 말이 변변한 담벼락에 빠짐없이 쓰여진 ‘반공방첩’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어린 시절 간첩은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 또래 사람이라면 로또도 없던 ‘국민학생’ 시절, 절반쯤은 방첩 정신으로 그리고 절반쯤은 현상금에 눈이 어두워 어디 눈먼 간첩이라도 하나 잡아볼까 하는 마음에 좀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친구들과 따라간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첩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게 간첩이었다.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다지만, 대한민국에서 누구도 될 수 있는 게 간첩이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간첩의 역사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간첩은 북에서 내려온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간첩은 출신도 가지가지다. 남파 간첩만 있겠는가? 1972년까지 북에서 실종되거나 사망한 북파 공작원 수는 무려 7726명이다. 살아 돌아온 사람을 포함한다면 대한민국이 북에 파견한 무장공작원(북에서 보낸 사람들을 우리는 ‘무장공비’라 부른다)은 1만명을 훌쩍 넘을 것이다. 이렇게 남과 북이 직접 상대지역으로 침투시킨 사람들 이외에도 간첩은 많았다. 휴전선이 쳐지지 않았던 일본 사회에서 살던 재일동포들은 누구보다도 쉽게 간첩으로 만들어졌고, 일본에 가서 무심결에 총련 출신 재일동포 잘못 만나고 오면 간첩이 되었다. 북에 끌려갔다 돌아온 납북 어부들도, 또 일부 해외 유학생들도 간첩이 되어 텔레비전에 등장했다.

간첩은 북에서만 내려온다는 편견과 함께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간첩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은 간첩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가로 보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 편견은 대중적인 차원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깨졌다 할 것이다. 간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007’처럼 언제인지 모르게 우리 주변에 다가와 무슨 일이든 할지 모르는 두려운 존재로서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1999)에 나오는 꺼벙한 간첩이나 게으른 고정간첩의 이미지이다. 그런데 후자의 이미지는 영화 때문에 퍼진 것이 아니라, 이미 대중들이 간첩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가 변화한 것을 포착한 영화사가 그런 영화를 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작사인 씨네월드는 남녀 41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간첩에 대한 느낌을 물은 항목에서는 간첩은 분단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인물일 뿐 나와 같은 인간(47.6%)이라는 대답이 정치적인 범죄자(21.7%), 없어져야 할 존재(15.5%)를 압도했다. 간첩을 만났을 때 무조건 신고한다는 대답이 42%에 그친 대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고 결정한다(22.9%)거나 자수를 적극 권유해 새 삶을 찾게 하겠다(21%)는 대답이 예상외로 많았다고 한다. ( 256호, 1999년 5월6일자)

공작금 몽땅 사기당한 간첩도

택시강도를 만나 공작금을 털려버리는 리철진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대중들에게 간첩은 뭘 모르는 존재였다. (2004)이란 영화가 나오기 전 30년도 넘었던 시절부터 우리는 누구나 다 아는 일을 새삼스럽게 물어보는 친구를 “간첩 아냐” 하며 면박을 주곤 했다. 한편으로는 간첩의 무시무시함을 과장하며 우리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공안 당국에 순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덕수궁 앞에서 서울시청을 찾는, 뭘 모르는 사람이 간첩이란 것을 일찍 깨우치고 있었다.

여러 유형의 간첩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참 웃지 못할 사연도 많았고, 보다 더 처절한 사연도 있었다. 사실 아무리 제임스 본드라도 좁은 택시 안에서 떼강도를 만났다면 꼼짝없이 공작금을 빼앗겼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남파 공작원은 공작금을 강도당한 것이 아니라 몽땅 ‘사기’당했다. 이 리철진의 선배가 정말 두고두고 분해서 어쩔 줄 몰라했던 것은 자신에게 사기를 친 작자가 자신이 북에서 온 것을 눈치채고 사기를 쳤다는 점이다. 간첩이 사기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주변에는 007과 같은 첩보영화를 즐기는 사람도 많고, 또 어떤 청소년은 장래 희망을 007 같은 첩보원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간첩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간첩과 스파이와 첩보원은 어떤 차이가 있는 말일까? 사실은 그게 그거다. 그러나 분단 한국의 맥락에서 간첩과 스파이나 공작원이나 첩보원은 너무나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간첩이 지금은 한 단어로 쓰이지만, 원래 간(間)은 상대방의 내부 사정을 살펴 정보를 파악하여 전달하는 스파이 일반을 의미한다면, ‘첩(諜)’은 적의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살피는 정찰병에 가까운 뜻으로 쓰인 것 같다. 지금 우리는 간첩을 파견하는 북쪽을 악랄하다고 비난하지만, 간첩에 대한 고전적인 저술을 남긴 손자는 의 ‘용간편’(用間篇)에서 어떤 경우에도 간첩을 쓰지 않을 수 없지만, 간첩은 어진 장수라야 부릴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에서 내려온 남파 간첩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스파이의 기원을 모세에게서 찾는 사람이 많다. 성경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정탐할 사람을 보내라고 시킨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정탐하다’는 영어 성경에서 ‘spy out’으로 되어 있다. 이 때문인지 간첩 또는 스파이란 창녀, 세리와 더불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으로 되어 있다.

국제법상에서 전시의 간첩 활동은 위법이 아니다. 단 걸리면 포로로 대접받지 못하고 교전 당사국의 국내법에 의해서 처벌받게 된다. 해석하기에 따라선 간첩 행위가 나쁜 게 아니라 걸린 게 잘못이라는 뜻도 될 수 있다. 또 정찰대원이 자기네 군복을 입고 적진에 들어가 정보수집 활동을 하는 것은 정상적인 교전 행위의 일환이기 때문에 간첩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정찰대원이 민간인 복장을 하거나 적군 군복을 입고 정보수집 활동을 했다면 간첩 활동을 한 것이 된다. 또 일단 소속군에 복귀한 뒤에 다시 적에게 잡힌 간첩은 포로로서 취급돼야 하며, 이전의 간첩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게 되어 있다. 이상은 1907년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채택되어 지금까지 유효한 ‘육전의 법규, 관례에 대한 조약’에 규정된 내용이다.

간첩의 개념을 새롭게 확대하다

그런데 이 조약에서 간첩이란 남한 사회처럼 다양한 인간들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아주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교전자의 작전지역에서 상대방 교전자에 통첩할 의사를 가지고 은밀 또는 허위의 구실하에 행동하고 정보를 수집하거나 또는 수집하려는 자가 아니면 이를 간첩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장하지 않은 군인으로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적군의 작전지역 내에 진입한 자는 간첩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국제법상의 간첩 개념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우리 삶 속에 너무 ‘친근(!)’하게 다가와 있는 간첩 중에 간첩 자격을 유지할 사람은 거의 없게 된다. 그 때문에 1960년대와 70년대에 대표적인 공안검사로 활동한 한옥신(韓沃申)은 만국평화회의에서 ‘육전조약’을 체결하던 당시와 “공산주의자들이 비공산 국가를 전복하려고 갖은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현황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고, “특히 우리나라는 북괴에 적대하는 준전시 체제에 있으므로 새로운 간첩의 정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한국에서는 간첩의 개념을 새롭게 확대하는 작업은 결국 수사당국의 문제제기를 사법부가 받아들이는 식으로 이루어져왔다. 한옥신에 따르면 간첩죄를 규정하고 있는 우리 형법이나 국가보안법, 군형법에는 간첩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다면서, 당시 가장 인기 있던 형법책인 유기천(劉基天·전 서울대 총장)의 ‘형법학’을 인용하여 간첩을 “적국에 알리기 위하여 대한민국의 국가기밀 또는 군사상의 기밀을 탐지, 수집하여 이를 적국에 누설하는 행위”이며, 기밀에 속하는 것으로는 “정부의 정책, 장기계획뿐 아니라 국군의 편제 및 편성인원, 작전계획, 병기탄약의 현황, 부대의 소재 등”이 있다고 서술했다.

간첩의 수는 늘어났다. 그런데 1960년대에는 실제 북에서 많이 내려보내기도 했지만, 기밀 범위가 늘어나면서 간첩을 만난 사람들도 단순히 간첩방조죄에 그치지 않고 간첩이 되었다. 기밀 범위 확대는 먼저 국제법상의 군사상의 기밀이 국가기밀 일반으로 확대됐다. 1957년 대법원은 “현재와 같은 대공 정세하에 있어서는 군사상의 기밀과 국가 일반정책하의 기밀의 한계는 이를 확연히 구별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4월혁명 직후인 1960년 10월 대법원은 “근대전이 비록 총력전이라도 정치, 경제, 문화 등 기타 사회 백반(百般)의 부문을 전쟁과 상관성이 있다 하여서 그를 즉시 군사와 동일시할 수 없다”고 기밀 범위 확대에 제동을 걸었다.

그렇지만 1961년 5·16 군사반란 이후 사법부의 독립성이 크게 침해받으면서 이 새로운 판례는 다시 뒤집혔다. 1966년 대법원은 국가기밀이라 함은 “북한 괴뢰에 대하여 비밀로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정보를 말한다”는 것이 되었고, 따라서 “그것이 비록 일반 행인이 쉽게 외부에서 목견(目見)할 수 있는 정보에 속한다고 하여 곧 그것이 위에서 말하는 국가기밀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할 것”이라 판결했다. 신문에 나서 널리 알려진 사실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국가기밀이 될 수 있었다. ‘국민학생’ 시절 북에서 “김일성이 살이 쪘다”고 말하거나 남에서 “박정희는 키가 작다”라고 말하면 무슨 죄냐는 우스개의 정답은 국가기밀누설죄였다. 그때는 철없이 낄낄댔지만 돌이켜보면 참 섬뜩한 상황이 대법원의 뒷받침 속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엇이 대한민국의 이익에 필요한지 판단하는 것은 국민이 아니라 공안 당국의 몫이었다. 아아, 예나 지금이나 참을 수 없는 저 국익의 모호함이여!

김추자의 노래가 금지곡이 된 이유

비전향 장기수 여러 분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분들이 자신의 사상과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것에 대해서는 참으로 감동했지만, 한편으로는 007을 방불케 하는 남북간의 치열한 첩보전에 관한 이야기를 실컷 들을 수 있겠다 하는 나의 천박한 기대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그들의 ‘시시한 활약상’에 조금은 실망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은 대남첩보 공작에서 조금이라도 성과가 있었던 사람들은 사형을 당하거나 중도에 전향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남파 공작원 출신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부여받은 사명이 무엇을 하거나 어떤 정보를 수집해 보고하라는 것보다는 그야말로 남쪽에 내려가 합법 신분을 획득하여 살라는 것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옥신도 “요즈음 남파되는 간첩 중에는 국가기밀을 수집하거나 각종 시설을 파괴, 태업, 선동을 하지 아니하는 자가 적지 아니하다”면서 “그들은 거점 확보, 즉 남한에서 합법을 쟁취하여 정착하기만 하면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렇다 보니 코미디 영화에서 게으른 고정간첩이 등장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간첩의 남파가 절정에 달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1968년에는 박정희 목 따러왔다는 124군부대의 청와대 기습 사건이 있었고, 이듬해에는 울진, 삼척과 같은 산악지대에 농촌혁명 근거지를 건설한다는 목적으로 대규모 무장공비들이 남파됐다가 전멸됐다. 이런 와중에 대대적으로 교육된 것이 ‘간첩식별법’이었다. 몇 군데를 찾아봐도 간첩식별법의 내용은 대개 비슷하지만 표현은 서로 다른 것으로 볼 때 중앙에서 제정된 것은 아니고, 각급 기관이나 학교에서 자체 제작한 것인 듯하다. 그 중 1969년도 6월 ‘방첩 및 승공사상 앙양기간’을 앞두고 홍성경찰서장 명의의 담화문에 나온 ‘간첩식별법’의 내용을 살펴보자.

1. 새벽 또는 야간에 산에서 내려오거나 바닷가를 배회하는 자

2. 계절과 유행에 맞지 않는 양복을 입고 다니는 자

3. 자주 이사하거나 자주 변장하는 자

4. 과거의 악질 부역자 처단자 가족과 남몰래 가까이 교제하는 자

5. 일본 밀항자로서 출처 불명의 많은 돈을 가지고 귀국한 자

6. 6·25 당시 행방불명 또는 납치됐다가 최근에 나타난 자

7. 한밤중에 북괴 방송을 듣는 자

8. 정부 시책을 은근히 비난하고 북괴를 지지, 찬양하는 자

9. 동무, 쟁취, 호상 등 좌익 용어를 무의식 중에 사용하는 자

10. 돈을 많이 써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자 하는 사람

11. 타인 이름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거나 발급받고자 하는 사람

12. 미화 또는 일화를 은닉하거나 바꾸는 자

13. 남한의 물가 시세나 지리를 잘 모르는 자

14. 야간에 밥이나 식료품을 훔쳐먹거나 훔치는 자

길거리는 방첩과 간첩신고를 강조하는 표어들로 넘쳐났다. 아예 우리의 일상어가 되어버린 “자수하여 광명찾자!”를 포함해서 “간첩신고 너나없고 간첩자수 밤낮없다” “간첩은 표시없다, 너도나도 살펴보자” “의심나면 다시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같은 구호가 나오더니 “사랑하는 애인도 알고 보니 간첩!”이라거나, “저기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같은 살벌한 구호까지 나오게 되었다. 급기야는 김추자의 노래 의 춤에서 손동작이 간첩의 암호라는 이야기까지 돌더니 그 노래는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오지를 돌며 남들이 눈길 기울이지 않던 야생화며 거미며 동굴을 탐사하던 사람들 중에 간첩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진짜 두려운 건 ‘간첩 만드는 사람들’

이런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간첩을 조금씩 우리 문화 속에 비틀어 정착시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어떤 머리 좋은 사람이 장난 삼아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영화 의 주제곡에 맞추어 “아침에 산에서 양복 입고 내려오는 자/ 광화문 앞에서 중앙청을 찾는 자/ 술집에서 취한 김에 동무, 동무 하는 자, 이런 사람 보∼면 지체없이 113으로/ 오오오 간첩신∼고는 113으로…”라는 노래가 한동안 유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홍세화 선생의 글을 보면 지금은 판소리의 대가가 된 임진택 선생이 간첩식별법 재담을 잘 했는데, “간첩 행위를 영업으로 하는 자/ 간첩 면허증을 소지했거나 갱신하려 하는 자/ 날씨가 화창한데도 진흙에 신발이 묻은 자(‘신발에 진흙’이 아님)” 등으로 사람들의 배꼽을 빼놓았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에 간첩식별법에 하나를 추가한다면 30대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간첩 잡아 팔자 고쳐보았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확실한 간첩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간첩을 갖고 웃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간첩은 주로 북에서 내려온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동백림 사건이 터지고 1971년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일동포형제간첩단 사건이 터지면서 얘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간첩이 우리의 일상을 옥죄기 시작했다. 아니, 진짜 우리가 두려워한 것은 간첩 그 자체가 아니라, 간첩 잡는 사람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간첩을 만드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2기가 시작된 것이다.

(간첩의 추억은 앞으로 재일동포 간첩 사건, 국내의 조작간첩 사건,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의 프락치 사건, 그리고 남북이 아닌 인접국과의 간첩 문제 등에 대해 3~4회 더 다루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국정원 홈페이지에 가면 간첩식별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PC방에 가면 외진 구석에 앉지 마시고, 버스카드 사용법은 꼭 익혀 다니세요. 그리고 불법적인 노사분규는 절대 배후 선동하지 마십시요. 간첩이 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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