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부식열도’ 시리즈를 영화화한 <쥬바쿠>(1999년). 한겨레 자료
일본 주식시장을 대표하는 닛케이지수(Nikkei 225)가 2024년 2월 말 3만9098을 기록했습니다. 1989년 말 3만9천 직전까지 갔던 닛케이지수가 거품 붕괴로 급락한 뒤, 장기에 걸쳐 지지부진하다가 34년 만에 전고점을 넘어선 것입니다.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3월18~19일 양일에 걸친 금융정책결정회합에서 –0.1%였던 기준금리를 0~0.1% 구간으로 인상한다고 발표했습니다. 8년 만의 마이너스금리 이탈이고, 17년 만의 금리인상입니다. 장기금리를 직접 통제하기 위해 도입한 대규모 국채매입(양적·질적 금융완화 또는 수익률곡선 통제)과 주가 부양을 위한 상장지수펀드 매입도 중단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비전통적 통화정책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일본의 오랜 염원이던 디플레이션과 임금 정체의 탈피가 가시화하면서 가능해진 조처로 드디어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은 1985년 달러 가치 절하를 위해 프랑스·서독·영국·일본에 외환시장 개입을 요구했고, 이는 플라자합의를 통해 수용됐습니다. 일본 정책 당국은 합의에 따라 달러를 대규모로 매각하면서 엔고(달러에 대한 엔화 가치의 상대적 절상)를 달성했고 이에 따라 일본 수출은 큰 폭으로 하락합니다. 이에 일본은행은 수요 진작을 위해 금리를 인하하고, 이때부터 자산 가격은 빠르게 상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경고가 없지 않았으나 일본 정책 당국은 대외 경제 환경을 이유로 금리인상을 미뤘고, 엔고와 저금리에 취한 일본의 기업과 금융기관, 개인들은 경쟁적으로 자산 매입에 나섰습니다. 일본 국내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에 불이 붙었을 뿐 아니라, 일본인의 미국 기업·건물 매입도 대규모로 이뤄졌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인 사이에 이른바 ‘떠오르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해졌습니다. 심지어 전세계 미술품과 와인까지 일본인이 싹쓸이하면서 가격이 급등했습니다. 하지만 역사상 모든 거품이 그랬듯이 영원히 가격이 상승할 수는 없습니다. 일본은행이 1989년 금리를 인상하면서 주가는 1년도 안 돼 반토막이 났고 30년 넘게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부동산 가격도 1992년 초부터 급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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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스키 료의 <금융부식열도>는 거품 붕괴 뒤 혼란에 빠진 일본의 모습을 그린 장편소설입니다. 1993년 도쿄의 대형은행 교리쓰은행이 주무대이지만, 일본 경제를 좌지우지한 대장성(일본 메이지유신 때 설립된 핵심 경제부처로 2001년 재무성과 금융청으로 분리 개편됩니다) 관료들과 정치인이 기업인과 맺는 관계도 비중 있게 다뤄 일본형 정·관·경 유착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 특유한 총회꾼·야쿠자·블랙저널리즘이 기업을 뜯어먹는 (또는 결탁하는) 행태도 생생하게 포함돼, 거품 붕괴 전후 일본 사회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 다케나카 하루오는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74년 교리쓰에 입행한 19년차 은행원입니다. 도쿄 중심가 도라에몬지점 부지점장으로 근무하던 다케나카는, 본점 총무부 주임조사역으로 발령받고 충격받습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주주총회에서 협박을 일삼는 총회꾼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주로 고졸 행원들이 근무하는 ‘섭외반’ 소속입니다. 이번 인사는 입행 동기인 종합기획부 주임조사역 스기모토 가쓰히코가 추천하고 사토 아키오 비서역이 결정했습니다. 이들은 도쿄대학 법학부 선후배 사이로 회사의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에이스입니다. 스기모토는 은행 중간 간부 중 핵심인 대장성 담당입니다. 도쿄대학 출신이 주도하는 대장성 엘리트들과 쉽게 어울려야 하기 때문에 주로 도쿄대학 법학부나 경제학부 출신이 이 자리를 맡습니다. 사토는 은행 회장이 총애하는 실세 비서로 상급자나 선배들도 그의 말이라면 쩔쩔맵니다.
소설 속 인물을 출신 학교와 입행 기수로 표현하는 게 좀 어색하지 않나요? 이 소설에는 수백 명이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인물에 대해 주인공이든 단역이든 가리지 않고 이런 학벌과 기수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대장성 63년 수석이라든가, 동기 중 에이스라든가 하는 관료 사이의 서열도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실제 일본 기업이나 정부 인물들이 학벌로 강력하게 얽혀 있는데다, 이 소설의 작가가 경제지 기자와 편집국장까지 거친 인물이라 소설을 마치 월간지 연재물 기사처럼 썼습니다.
다케나카는 사토의 특명을 받아 예식장 사장 가와구치 마사요시의 대출 요구를 은밀하게 조사합니다. 섭외반 직원이 대출 관련 일을 맡은 것은, 가와구치가 긴자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회장 딸 미하라 마사에에게 접근해서 청탁했기 때문입니다. 가와구치가 야쿠자와 밀접함을 알게 된 다케나카는 대출을 거절하고 그의 실체를 회장에게 보고할 것을 주장하지만, 사토와 스기모토는 회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담보나 심사도 없이 대출해주도록 지시합니다. 황당해 보이지만 거품기 일본 은행들은 대출을 폭발적으로 늘리면서 부정 대출이 흔했고, 야쿠자와 결부된 대출도 상당했다고 합니다. 소설 속 전문가는 ‘야쿠자 때문에 채권 회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일본 경기 회복이 늦춰지는 야쿠자 불경기’에 빠져 있다고 진단합니다. 특히 ‘개인적 다툼을 법적 수단에 호소하지 않고 내밀하게 해결하는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관습’ 때문이라는 대목은 매우 날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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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딸을 사로잡은 가와구치는 점점 더 본색을 드러내고 다케나카는 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부정 대출을 주총에서 폭로하겠다는 총회꾼들과 얽히게 됩니다. 총회꾼은 약간의 주식을 보유한 채 주주총회에 참석해 회사를 협박하는 이들입니다. 주로 우익 행동단체, 야쿠자, 블랙저널리즘 소속원들이 활동하는데, 총회꾼 중 거물은 은행 수뇌부와 직접 대화하고 거액을 요구할 정도로 기세등등해서 큰 골치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상법에 ‘이익공여금지’ 조항을 두어 주주의 의결권 행사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금품을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형사처벌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극성 총회꾼의 횡포를 막기 위한 것인데, 서구에선 찾아볼 수 없는 조항입니다. 소설이 출간된 직후 일본의 다이이치간교은행이 총회꾼 고이치 류이케의 입막음을 위해 10여 년에 걸쳐 무려 460억엔 상당의 이익을 제공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과 함께 <금융부식열도>의 선견지명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다카스기 료는 이 사건을 중심으로 삼아 시리즈 2권을 집필했습니다. 국내에는 총회꾼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가끔 등장하더라도 영향이 미미한 것에 비하면 꽤 다른 모습입니다.
소설에는 대장성 소속 재정금융연구소장으로 ‘자산가격 변동의 메커니즘과 그 경제적 효과’라는 대장성의 자기비판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니시오카 마사히사(이 보고서는 실제 보고서입니다. 그리고 니시오카는 실제 은행국장이었던 니시무라 요시마사를 그린 듯합니다)처럼 부실 정리와 은행 개혁에 몸을 던지는 관료도 등장하지만, 부패한 관리도 여럿 등장합니다.
그중 가장 엽기적인 것은 ‘노팬티샤브샤브’입니다. 도쿄 신주쿠 성인음식점(?) ‘로란’이라는 가게는 미모의 여종업원이 속옷을 입지 않은 채 접대하는 곳입니다. 가격은 고급 요정 못지않게 비싼 집이지만 인기가 높아서 은행 엘리트 직원들과 대장성 관료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고 합니다. 대장성의 잘나가는 관료가 이곳에서 엽기적인 행동을 하다 동료의 투서로 출세의 발목이 잡히는 대목을 읽다가 소설의 상상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실제 있었던 사건입니다. 1998년 대장성 간부들이 ‘노팬티샤브샤브’에서 접대받은 것이 드러나, 장관이 물러나고 대장성이 해체되는 계기가 됩니다. 소설은 이를 한 해 전에 예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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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권 합쳐 900쪽이 넘는 소설이지만 순식간에 읽을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합니다. 책을 덮으면서 우리 현실과 비교해봤습니다. 당연히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소설과 현실의 차이가 있고, 일본과 한국의 차이도 있고, 1993년과 2024년이라는 30년의 시차도 있습니다. 야쿠자와 한국의 조폭은 이름만 비슷하지 중요성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지만 아주 다른 것은 아닙니다. 199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다양한 기업과 정부의 한쪽에서 관찰한 제 경험에 따르면 ‘참으로 유사하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기업인들과 경제부처 공무원들이 관심 있게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입니다. 2주마다 연재.

소설 <금융부식열도>, 펄프 펴냄
다카스기 료의 <금융부식열도>는?
다카스기 료(高杉良)는 1939년 일본 도쿄 출생의 소설가입니다. 산업전문지 <석유화학신문> 기자에서 편집장까지 거친 뒤, 1975년 엔지니어를 주인공으로 한 기업소설 <허구의 성>으로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기업을 무대로 한 수많은 작품을 집필한 일본 경제소설 분야의 대표 작가입니다. <금융부식열도>는 1997년 가도카와출판사에서 출간됐고, 국내에는 2012년 이윤정의 번역본이 민음사(펄프)에서 나왔습니다. 거품 붕괴 이후 금융기관과 경제부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소설 속 묘사와 유사한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지면서 화제가 됐습니다. 이 작품의 인기가 높아져 다카스기는 총 다섯 편의 시리즈를 출간하고, 여러 편이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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