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애덤 스미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불멸의 저작 <국부론>을 발표해 전세계로부터 ‘경제학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1723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니 2023년은 스미스 탄생 300년이 되는 해인데, 그가 무덤을 박차고 다시 튀어나왔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당연히 현실은 아닙니다. 조나단 와이트의 소설 <누가 스미스씨를 모함했나> 속 이야기입니다.
리치먼드 번스는 미국 버지니아주 허스트대학의 경제학 교수입니다.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있는 유명 대학의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논문 집필만 남겨둔 상태입니다. ‘애덤 스미스 석좌교수’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지닌 로버트 앨런 라티머가 번스의 지도교수입니다. (소설에서 학교 이름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케임브리지에는 하버드대학과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만 있고 두 곳 모두 세계 최고의 경제학과를 갖고 있으니 학교 이름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티머는 소련 붕괴로 전세계에 도미노효과가 일어나자 유명한 개혁 구호 ‘S-L-P’(Stabilize! Liberate! Privatize! 안정화! 자유화! 민영화!)를 창안하고 정부 예산 축소, 보조금 삭감, 탈규제, 국유 자산 매각을 요구했습니다. 라티머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선봉장으로 고위 관료와 초국적 기업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초국적기업 월드켐이 러시아 국영 알루미늄 광산을 인수할 수 있도록 컨설팅하는 것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번스는 라티머 교수의 지시로 이에 필요한 경제학 모델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조용한 시골 학교에서 논문 집필에 몰두하던 번스에게 루마니아 출신 이민자인 트럭 정비공 해럴드 팀스가 경제학자를 만나야 한다며 찾아옵니다. 번스의 애인이었던 화가 줄리아 브룩스가 소개했다고 합니다. 팀스는 ‘애덤 스미스가 내 정신을 빼앗아버렸단 말이야! 그는 온 세상이 자기 말을 끝까지 들어주길 원한다’라며 절규합니다.
번스는 정신 나간 팀스에게 기겁해서 경제학자가 아니라 의사를 만나는 게 낫겠다며 팀스를 돌려보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브룩스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다시 팀스를 만납니다. 여전히 팀스의 말은 횡설수설처럼 들립니다. 자신이 쓴 <국부론>뿐 아니라 <도덕감정론>도 같이 읽으라 권하면서 ‘부유함이나 빈곤은 본질적 의미에서 행복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평정함 그 자체가 행복의 본질’이라거나, ‘자유에는 도덕적 의미를 망각하는 위험이 뒤따르고,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일깨우는 게 내 임무’라는 식입니다. 번스로서는 이런 주장이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시장경제의 완벽함을 입증한 애덤 스미스가 한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번스는 호기심에 도서관에서 <도덕감정론>을 빌려 읽습니다. 그는 경제학자지만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아마 대부분의 경제학자가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그중 한 명입니다). 팀스가 스미스의 목소리라며 내뱉은 말이 전부 이 책에 있음을 알고 번스는 깜짝 놀랍니다. 번스는 대학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는 정비공이 어떻게 이런 내용을 알았는지 궁금해합니다.
번스는 다시 팀스를 만나 시험해봅니다. 스미스의 출생연도, 고향과 가족 사항 같은 것은 물론이고 ‘튀르고와 루소의 논쟁’ 같은 전문적인 내용과 스미스가 어릴 때 집시에게 유괴된 일 등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도 팀스는 막힘없이 정확하게 답변합니다. 번스는 결국 두 손 들고 스미스의 목소리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번스는 스미스의 견해를 더 듣기 위해 팀스와 여행을 떠납니다. 라티머는 월드켐에 결과물을 제출해야 하는 날짜가 다가오는데 번스와 연락이 끊어지자 조바심이 나서 번스를 찾아나섭니다. 여기에 과거 라티머의 제자였던 맥스 헤스까지 등장합니다. 헤스는 대학원 시절 남미 여행을 한 뒤 현지의 열악한 모습에 충격받고 체게바라주의자로 변신한 인물입니다. 라티머의 면전에 대고 “가난한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굶어 죽는데, 당신은 이것을 ‘안정화’라고 말하지! 생필품값이 미친 듯이 인상되는데, 이것을 ‘자유화’라고 말하지! 소수 엘리트층이 국가의 돈을 훔치는데, 이것을 당신은 ‘민영화’라고 말하지!”라고 공격합니다. 이윤보다 인민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과격 테러단체 POP(People Over Profit)의 행동대원이 된 헤스는 번스와 팀스를 죽이려 합니다. 월드켐 이사회날 번스는 자본주의와 기업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보여줍니다.
저자 와이트는 소설을 전개하면서 여러 차례 격렬한 토론을 묘사합니다. 라티머와 번스, 또 번스와 스미스 사이에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경제학적 토론이 기본이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스미스가 좌파 학자들과 벌이는 논쟁도 있습니다. 번스가 근무하는 허스트대학의 사회학자 케럴 노튼과 국제관계학자 웨인 노튼은 승자독식,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를 언급하며 사유재산제도 폐지가 도덕성 회복을 가져오리라고 주장합니다. 마오쩌둥과 피델 카스트로를 성공 사례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스미스는 팀스의 입을 빌려 ‘압제를 해결하는 것은 더 강력한 압제가 아니라 경쟁’이라고 말합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1인 독재 사회에서보다 오히려 도덕이 더 잘 가꿔진다’면서 좌파 학자들과 의견을 달리합니다.
심지어 스미스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 프랑스 철학자 장자크 루소, 사상가 볼테르, 중농주의 경제학자 프랑수아 케네와 논쟁을 벌이는 장면도 있습니다. 모두 스미스와 동시대 사람인데, 이들은 스미스처럼 다른 현대 미국인의 몸을 빌려 참여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제조업과 농업의 관계, 자연과 문명, 교육의 역할 등에 대해 위대한 학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두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출판 시기입니다. 번스는 ‘어떤 사람들은 <도덕감정론>(1759)이 순진한 청년이 끼적인 낙서였고 철이 든 이후 <국부론>(1776)을 쓴 것이라 한다’고 얘기합니다. 이에 스미스는 ‘내가 <도덕감정론> 6판(1790)을 낸 것이 <국부론> 출간 후 14년 뒤라네. 인간 본성에도 맞지 않고, 또 상업에 대해 직접 썼던 책과 모순되는 내용의 책을 재발행할 정도로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말인가’라고 반박합니다.
마침 2023년 시카고대학에서 미국과 유럽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을 조사한 결과가 있어 소개합니다. 첫째 질문,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비유는 근대 경제학 발전의 기초인가?’에 응답자 74명 중 70명이 ‘그렇다’(95%)고 했습니다. ‘어느 쪽도 아니다’와 ‘아니다’는 각각 3명(4%)과 1명(1%)에 불과했습니다. 스미스가 ‘경제학의 아버지’로 경제학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부분의 경제학자가 동의함을 알 수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둘째 질문이었습니다. ‘이 비유가 순수 자유방임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되는가?’라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한 경제학자가 63명(85%)이었고, ‘어느 쪽도 아니다’가 9명(12%)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답한 경제학자는 단 2명(3%)이었습니다. 이를 보면 스미스를 마구 인용하면서 정부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극단적 시장만능주의라는 주장을 우려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미스가 무덤을 박차고 나올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누가 스미스씨를 모함했나>를 읽는 것이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읽는 것을 당연히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애덤 스미스를 이해하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추천합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소설로 읽는 경제학: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 격주 연재.
조나단 와이트와 <누가 스미스씨를 모함했나>는
조나단 와이트는 미국 리치먼드대학의 경제학 교수입니다. 1973년 태어난 와이트는 외교관인 부모와 함께 아프리카와 남미 여러 나라에서 거주했고, 이때의 경험이 대학 이후 그를 경제발전론으로 이끌었습니다. 1995년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읽고 학문과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합니다(일반인의 생각과 달리, 경제학자 중 애덤 스미스의 책을 읽은 이가 많지 않습니다). 이후 연구를 애덤 스미스와 경제학의 윤리적 기초에 맞췄고, 논문 외에 고등학교 교사를 위한 강의 교재 개발과 소설 <누가 스미스씨를 모함했나>의 집필까지 나아갔습니다. 이 소설은 미국에서 2002년 출간돼, 이후 여러 언어로 번역됐습니다. 한국에는 안진환과 이경식의 두 번의 번역으로, <애덤 스미스 구하기> <세이빙 애덤> <누가 스미스씨를 모함했나>의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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