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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경제] 김종인 시각에서 본 ‘공정경제 3법’

“박근혜 공약보다 완화”… 진보 전유물이라는 보수 프레임과는 정반대 인식
등록 2020-10-10 07:51 수정 2020-10-12 01:04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020년 9월25일 국회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기 위해 대표실로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020년 9월25일 국회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기 위해 대표실로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012년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 전 야인일 때 두 시간 남짓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의 벗이자 원로 언론인 남재희 선생이 함께했다. ‘대화를 나눴다’라기보다 두 노(老)정객의 말씀을 듣고 틈이 날 때 질문 몇 차례 던지는 모양새였다. 묻지 않아도 그는 궁금한 지점을 다 안다는 듯 술술 이야기를 풀어냈다.

동서고금을 오가는 그의 해박함에 놀랐고 정치와 경제 현안을 깊이 파악하고 있는 식견에 또 놀랐다. 학자들은 이론에 밝아도 현안에는 무딘 경우가 종종 있다. 정치인들은 현안은 인지해도 깊이는 얕다. 그는 학자인 듯 정치인인 듯한데 어느 쪽보다 나았다. 세세한 사안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 언급이 있었지만 굳이 토를 달 정도는 아니었다.

야당·언론, 7년간 풍화된 내용 애써 무시

8년 전 기억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최근 그의 인터뷰 기사(김종인 “우리 당 의원들 공정경제 3법 검증도 않고 덩달아 반대”)를 읽은 게 계기였다. 9월30일치 <한겨레>에 실린 신승근 논설위원과의 문답인데, 내용 중 ‘공정경제 3법’이라고 부르는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과 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에 대한 그의 의견은 이 법안의 연원과 함의를 온전히 담고 있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나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그처럼 잘 짚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발언 ① “지금 나와 있는 개정안은 박근혜 정부의 법무부가 박 대통령 공약을 참작해 낸 것보다 더 완화한 측면이 있다.”

아마도 3법 중 상법을 예로 들어 말한 것을 신 위원이 옮겨 적으면서 ‘법무부’가 강조된 것으로 추정(공정거래법은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그룹감독법은 금융위원회가 소관 부처. 금융그룹감독법은 박근혜 공약에는 없었음)되나 그 의미는 충분히 전달된다. 공정경제 3법은 문재인 정부 혹은 좌파(진보) 정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 정부·여당은 섭섭해하고 야당은 당혹스러울 수 있으나 틀리지 않는 말이다. 2020년 8월 말 정부가 해당 법안을 모두 국회에 제출한 뒤 야당은 물론 보수·경제 언론, 재계의 잇단 반대 주장에는 이런 사실관계, 즉 연원이 삭제됐다. 그런 주장에는 ‘좌파(진보) 정부의 기업 옥죄기’라는 해묵은 프레임이 노골적으로 깔려 있다.

김 위원장의 말 한마디는 그런 프레임 중 한 축을 허물어뜨린다. 외려 공정경제 3법은 특정 정치세력의 이념과 가치에 토대를 둔 이념 법안이 아닌, 보수·진보 정부를 아우르는 시대정신이 투영된 법안이란 점을 김 위원장의 발언은 시사한다. 특히 “박 대통령 공약보다 더 완화한 측면이 있다”란 언급은 세 법안에 담긴 내용이 7년여 동안 풍화를 거쳤다는 것이며, 그 방향은 강화가 아니라 약화였다는 ‘정보’도 담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 ‘후퇴’라고 읽을 수도, ‘합리적 조정’ 혹은 ‘타협’이라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이 언급이 해당 법률안의 이념색을 좀더 희미하게 하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김종인 “자책 필요하다”며 재계 책임 강조

발언 ② “재계가 특이한 상황을 만들지 않았으면 그런 법이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자기들 스스로 자책할 필요가 있다.”

김 위원장은 이 발언으로 ‘좌파(진보) 정부의 기업 옥죄기’라는 프레임의 또 다른 축 ‘기업 옥죄기’를 무너뜨린다. 해당 개정안에 대한 재계와 보수 언론의 주장 중 하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좌파(진보) 정부가 세상 물정은 놓치고 고집스럽게 규제 강화에만 골몰해 한국을 ‘규제 갈라파고스’로 만들어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힐난이 담겨 있다. 김 위원장의 ‘특이한 상황’이란 말뜻을 좇으면 ‘갈라파고스는 바로 재계’라고 지적한다. 재계와 보수 언론의 논법에 따르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한국 재계의 특수성이 공정경제 3법이 나오게 된 뿌리라는 설명이다. 경제 관련 법과 규제는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만큼이나 특수한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살인이 없는 사회에 살인죄가 필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국 재계의 특수성은 사실 한국 경제의 오래된 난제였다. 고도성장의 한 축을 맡으며 여러 ‘성공 신화’를 써온 주역이지만 그 과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개발연대 시절의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다. 외려 2000년 이후 한국 경제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이후 편법과 부정의 방식은 그 진위를 손쉽게 밝히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발전했다. 한 예로 총수의 그룹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해 분식회계와 시세 조종, 합병 등 금융기법이 총동원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관련 사건의 혐의를 규명하는 데만 3년이란 검찰 수사가 필요했고 각 분야 전문가들이 직간접으로 대대적인 토론을 했다. 김 위원장은 기업 규제법이 등장한 동기와 배경을 짚으며 재계의 몰염치를 비판한다.

발언 ③ “재계가 작동을 해서 밀어버려 지금까지 온 것.”

김 위원장은 박근혜 정부의 입법 추진이 무산된 이유를 ‘재계의 작동’에서 찾았다. 재계의 적극적 로비 탓인지, 아니면 임기 첫해인 2013년 추가경정예산을 두 번 편성할 정도로 경기가 나빠서 정권의 재계 눈치 보기 탓인지는 김 위원장이 세세히 말하지 않아 ‘작동’의 의미가 명확하지는 않다. 김 위원장 스스로도 그 사연은 정확히 모를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임기 6개월 뒤 정책 기조를 경제민주화에서 경제활성화로 틀어버리면서 김 위원장도 정권과 멀어졌다. 그가 ‘작동’이란 모호한 표현을 쓴 것도 이런 사정 때문으로 추정된다. 더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밀어버려 지금까지 온 것’이다. 재계의 작동만 없었다면 진작에 도입했거나 강화했어야 한다는 의미다. 과도한 조처가 아니라 개혁 지체가 더 문제라는 것이다.

김종인 위원장이 말하지 않은 것

김 위원장은 정작 공정경제 3법이 기업 현장에 몰고 올 파장은 말하지 않았다. 재계와 보수 언론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 같은 국제 투기자본에 국내 주력 기업들이 먹잇감으로 전락한다거나 투자와 고용 확대에 써야 할 자금을 경영권 방어에 써야 한다고 우려한다. 정부·여당은 해당 세법 안에 ‘공정경제 3법’이라고 이름 붙인 것처럼 해당 법안이 통과되면 재벌의 폐해가 크게 줄고 공정한 시장경제가 조성될 것이라며 순기능을 강조한다. 김 위원장은 서로 다른 양쪽 주장의 타당성에 대한 언급을 <한겨레> 인터뷰에서 하지 않았다.

규제는 정의적 관점에서만 볼 수는 없다. 편익을 따져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김 위원장이 파장에 대해 말을 아낀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제도 변화가 불러올 나비효과를 예단하기 어려운 현실적 측면 때문이라기보다, 사실 순기능이든 역기능이든 그 파급이 크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는 공정경제 3법이 재벌그룹의 편법 행위를 줄이는 첫 단추에 불과하다는 진보적 경제학자들의 시각과 거리가 멀지 않다.

김경락 <한겨레>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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