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일 정부는 ‘2020년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에서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Corporate Venture Capital) 도입 방침을 내놓은 데 이어, 11일에는 7월 중에 세부 방안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경제정책 방향에는 ‘제한적 검토’라는 단서를 달며 구체적인 도입 시기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정부가 CVC 도입에 부쩍 속도를 낸다는 해석이 뒤따랐다. 정치권의 발걸음은 좀더 빠르다. 21대 국회가 열린 직후인 6월 초 CVC 도입을 위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 개정안이 3건 발의됐다. 더불어민주당(김병욱·이원욱)이 2건, 미래통합당(송언석)이 1건 냈다. 세 개정안의 내용이 비슷한 걸 보니 CVC 도입에 표면상으로 여야 사이에 견해차가 없거나 적은 듯하다.
대기업 자금 활용해 벤처 활성화 명분
정부와 정치권이 CVC를 도입하려는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다. 김병욱 의원이 밝힌 공정거래법 개정 이유는 이렇다. “대기업 자본을 벤처·스타트업 육성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함. CVC는 벤처·스타트업에 대해 장기위험자본 공급 기능을 수행하여 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기업의 비즈니스 기회 창출, 모기업을 통한 자본, 경영관리, 기술지도 등 종합적인 지원을 통해 산업 생태계 전반에 발전적인 것으로 기대함.” 한마디로 대기업의 돈을 활용해 벤처 시장을 활성화하자는 게 1차 목표다. 이를 통해 산업 역동성과 기업 투자를 늘려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2017년 하반기 이후 수축 국면에 들어간 뒤, 2월 이후 코로나19 확산으로 급격히 꺾인 경기 상황도 CVC 도입을 부추기는 배경이다.
도입론자가 기대하는 효과가 얼마나 일어날지는 신중하게 지켜봐야 하겠지만, 국내 벤처 시장 상황을 고려할 때 이해할 수 있는 입법 목적이다. 자동차·조선·석유화학 등 주요 대기업이 장악한 전통 제조업은 중국의 추격 속에 시장지배적 지위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경제의 새 동력이 돼야 할 신산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춘 기업군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 이후 공공자금을 적극적으로 투입하며 육성하는 벤처 시장도 소수의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조원 이상인 신생 벤처기업)을 빼면 그 저변이 넓지 않다.
이런 합목적성에도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CVC 도입은 그간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현상을 차단하는 방파제 노릇을 해온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상대 업종을 소유·지배하는 것을 금지) 원칙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어떤 이는 이런 점을 들어 “재벌에 대한 노골적 구애”(경제개혁연대 6월2일 성명)라고 혹평하며 “금산분리 대원칙을 허무는 방안의 즉각 중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6월11일 성명)을 요구한다. CVC 도입은 향후 입법 과정에서 첨예하게 논쟁할 것으로 보인다.
CVC는 금융회사
CVC 도입의 전제조건은 공정거래법 개정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논의하는 방식은 일반지주회사의 자회사로 CVC를 두는 것이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일반지주회사가 금융회사를 둘 수 없게 돼 있고, 벤처캐피털은 신기술금융사로 분류하는 터라 금산분리 원칙을 담은 공정거래법을 개정해야 한다.
CVC가 금융회사인 이유는 그 투자 구조에서 드러난다. CVC는 다른 사람의 자본을 끌어들여 다수의 투자조합을 결성한 뒤 여러 벤처회사에 투자해 이익을 얻는 전략을 취한다. 때로는 투자 대상 회사의 지배 지분을 획득해 대주주 혹은 최대주주가 되기도 한다. 세부적인 성격은 차이가 나지만 투자조합은 ‘론스타’ 같은 사모투자전문회사(PEF)와 비슷한 활동을 한다. 근본적으로 고객 돈으로 자금을 운용하는, 증권사·자산운용사 같은 일반 금융회사와 성격이 다르지 않다.
공정거래법에 금산분리 원칙이 반영된 이유는 지주회사가 다른 사람의 자본으로 손쉽게 경제력을 확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경제력 집중은 작게는 특정 산업군의 독과점을 낳고 크게는 산업 혹은 경제 전체의 불균형을 촉발한다. 공정거래법이 지주회사에 자회사와 손자회사에 대해 일정 비율 이상 지분을 확보하도록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월이 흘렀으나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이끈 주된 원인 중 하나가, 재벌그룹이 계열 금융회사를 동원한 계열사의 무한 확장(문어발 확장)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삼성그룹의 지배구조가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이유도 총수 일가가 고객 돈(삼성생명)으로 삼성전자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일반지주회사가 아닌 터라 공정거래법상 금산분리 규제를 적용받지 않는다. 그간 정부와 시민단체, 전문가그룹이 삼성그룹의 지주회사로의 지배구조 개편을 요구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경제력 집중은 경제 영역을 넘어 정치·사회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재벌 공화국’ ‘삼성 공화국’이다. 주요 재벌그룹 총수가 비자금이나 횡령, 배임 등의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재판부는 종종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그간 한국 경제에 기여한 바를 감안해” 등의 이유로 감형한다. 과도한 경제력 집중이 사법 영역에까지 침식하는 사례다.
‘일감 몰아주기’ 포착 어려울 수도
CVC 도입의 또 다른 우려도 있다. 계열사 내부 거래와 지원 활동을 통해 총수 일가의 부를 늘려주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현재 공시 규정에선 CVC가 특정 투자조합을 결성할 때 계열사의 출자 비중과 금액은 공개하도록 하나 이렇게 결성된 투자조합의 투자 현황은 공시 대상이 아니다. 이 구조에서 특정 그룹의 총수나 그의 자녀가 스타트업을 설립하고, 이 그룹의 CVC가 계열사들의 자금을 끌어모아 총수나 총수 자녀가 대주주인 스타트업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상품과 서비스를 몰아줄 수 있다. 해당 스타트업이 계열사로 편입될 경우 해당 거래 내용은 고스란히 당국의 모니터링에 포착되지만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투자조합’ 과정에서 실거래 내용은 현 제도 아래에선 드러나지 않는다.
정부는 CVC 도입에 따른 부작용을 줄일 방안을 마련할 때 이 부분을 고려할 것으로 보인다. 투자조합의 투자 현황 공시 의무나 당국 보고 의무를 두거나, 투자 대상에 총수 일가 소유 회사를 제외하는 방안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정부는 7월 중 CVC 도입 부작용을 줄일 방안을 마련해 발표할 계획이다. 이미 국회에 발의된 공정거래법 개정안과 병합해 9월 국회 때부터 본격 심의에 들어가게 된다. 보완 방안은 정도의 차이가 나겠지만, 공정거래법의 토대인 금산분리 원칙이 흔들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공정거래법 소관 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는 최대한 금산분리 원칙을 사수한다는 견해를 내비쳤으나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한 정부와 정치권의 속도전에 설 자리를 잃어가는 모양새다. 정부 안팎에선 CVC가 조성할 투자조합의 투자 내용에 대한 보고와 공시 의무가 도입되고, 총수 일가가 관여한 스타트업에는 투자할 수 없도록 하는 투자 대상 제한 등의 보완책이 거론된다.
금산분리 원칙은 공교롭게도 문재인 정부에서 꾸준히 허물어지고 있다. 애초 금산분리는 진보·개혁 정치세력이 강조하고 보수 정치세력이 흔들려던 원칙이었다. 2008년 집권한 이명박 정부의 경제 분야 첫 공약이 바로 은행법에 반영된 산업자본의 보유 지분 한도와 의결권 한도 규제(은산분리) 완화였다. 당시 현 정부에 참여하는 상당수 전문가그룹은 강한 우려를 드러냈다. 이런 ‘진영 구도’와 비교하면 개혁정부로 분류되는 현 정부의 행보는 흥미롭다. 2018년 10월 인터넷전문은행 특별법 제정(인터넷은행에 한해 산업자본의 은행 지배 허용)이나, 이듬해 9월 은행 등 금융회사가 핀테크 기업에 한해 일반 기업에 출자를 허용하는 ‘금융회사의 핀테크 기업 투자 가이드라인’ 도입이 그 예다. 모두 정보통신기술(ICT)과 금융업이 융복합하는 산업환경 변화를 반영한 제도 개혁이라는 명분을 현 정부는 내걸었다.
갈수록 허물어지는 ‘금산분리’ 원칙
20년 남짓 재벌 규제의 근간이 돼온 금산분리의 풍화는 산업환경 급변에 따른 불가피한 과정인지, 아니면 한국 경제의 잠재적 위험을 높이고 재벌 중심 경제체제를 더 공고히 하는 것으로 귀결될지 어느 쪽도 명확하지 않다. 정부와 관련 전문가그룹의 고민이 깊어진다.
김경락 <한겨레>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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