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경제가 비상 국면에 접어들었다.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 과거 감염병 사태에 빗대 현 상황을 예측하던 목소리는 쏙 들어갔다. 보름 남짓 널뛰는 주가지수와 채권금리, 원화가치를 목격한 정부와 전문가들은 2008년 금융위기나 1997년 외환위기를 떠올린다. 상황이 급반전하면서 ‘정상’ 시기에 진리처럼 여겼던 경제정책의 도그마도 녹아내리고 있다. 신중한(혹은 관행에 젖은) 관료도 도그마에만 매달릴 수 없게 됐다.
‘정책적 상상력’의 예외가 된 40%‘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하 채무비율)을 40% 선에서 유지해야 한다는 명제는 우리나라 경제정책에 굳어진 도그마 중 하나다. 40%에는 ‘심리적 마지노선’이란 수식어도 관행처럼 붙어 있다. 재정 당국은 이를 준거 삼아 예산을 짜고 세법을 만들어왔다. 정치권에서도 이것에 도전하는 목소리는 드물었으며, 주류 학계에서도 이의를 제기하는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언론도 다르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정치 성향이나 시대 배경과도 무관한 터라, 채무비율 40%는 시공을 관통하는 ‘진리’의 위상을 얻은 듯했다.
이 도그마에 균열이 인 것은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되면서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국면만 해도 정부는 채무비율 40% 선을 넘지 않으려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각 부처에 “정책적 상상력을 총동원하라”고 촉구했으나, 이 상상력에는 채무비율 40%를 훌쩍 뛰어넘는 과감한 재정 대응은 포함되지 않았다. 재정지출을 고작 8.5조원(추경 11.7조원에서 세입경정 3.2조원 뺌) 확대한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정부가 추경안을 짜서 국회에 제출한 3월 초까지만 해도 여당과 정부는 채무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추경안이 국회에 제출된 뒤 변화의 조짐이 일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유럽과 미국까지 감염이 확산된 시기다. 국내외 경제분석 기구들은 마이너스 성장 가능성을 제기했고, 금융시장에는 공포가 덮쳤다. 전례 없는 상황임이 확실시되자 과거에는 도저히 들을 수 없던 목소리가 나왔다. 대표적인 예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말이다. “재정이란 게 긴급하고 위기 상황에 쓰라고 있는 건데 기재부 담당관들이 부채(채무) 걱정하고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잘라버릴 수도 있다.”
위기대응용 재정지출 확대로 허물어진 원칙채무비율 40%론이 비빌 언덕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언덕은 현재적 의미를 상실한 지 10년도 더 지났다. 40%론의 뿌리는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영구 평화’와 ‘전후 재건’이란 두 목표 아래 통합 과정을 밟아오다, 2000년대 초 단일통화(유로)를 쓰는 유럽연합(EU) 체제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여러 조약이 유럽국 내에 체결되는데, 1992년 2월 네덜란드에서 유럽 정상 사이에 체결된 ‘마스트리흐트조약’이 그중 하나다. 이 조약에 재정 적자 비율 3%와 채무비율 60%가 회원국이 준수해야 할 조건으로 담긴다. 이 내용은 2000년대 초 마련된 유럽연합 재정 준칙에도 반영된다.
이 기준이 마련된 이유는 여러 국가의 연합체인 유럽연합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면 각 회원국들이 비슷한 경제 체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 재정 당국은 유럽의 재정 준칙을 토대로 한국 상황을 반영해 40% 마지노선을 설정해왔다. 빠른 고령화 속도에 따라 늘어날 연금 비용과 언젠가 맞이할 통일 시대에 써야 할 비용 몫으로 20%포인트 완충 여력을 상시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문제는 유럽의 60% 준칙은 그 의미가 사라진 지 오래라는 점이다. 우선 2000년 초·중반 이 준칙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동유럽 국가들을 대거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면서 준칙은 사실상 형해화됐다. 유럽 통합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스스로 세웠던 준칙을 강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오늘날 유럽연합은 주요 7개국(G7)에 들어가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같은 초강대국부터 개발도상국(혹은 후진국) 범주에 들어가는 다수의 소국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이 준칙의 의미가 완전히 허물어진 것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은 위기 대응을 위해 기존 준칙이나 관행을 버리고 재정지출을 크게 늘렸다. 이에 ‘선진국 클럽’이라고도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채무비율은 73%에서 110%로 훌쩍 뛰었다. 재정 당국의 40%론 뿌리가 되는 60% 준칙은 정작 그 준칙을 세운 유럽연합에선 낡은 서랍에 들어간 지 오래이며, 경제·정치적 의미도 퇴색됐다는 얘기다. 외려 유럽을 포함한 선진국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국제기구는 2008년 이후 경제위기 국면에서 재정 역할의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탐구하며 실천 기준을 내기도 했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상황과 미래에 맞는 새 원칙 수립에 나섰다는 의미다. 채무비율을 재정 운용의 핵심 준거로 삼는 대신 ‘재정지출 확대→ GDP 증가→ 채무비율 축소 내지 안정’의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다. 지출 확대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채무비율이 증가하더라도 중기적으로는 경제성장을 높여 채무비율의 분모인 GDP 증가로 채무비율도 다시 안정세로 돌아설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분석틀에선 채무비율 상승을 우려해 재정지출을 줄일 경우 GDP가 줄어 채무비율이 더 치솟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올해 말 채무비율 43% 안팎 이를 듯재정 당국이 도그마 속에 갇혀 있지만 채무비율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강한 도그마도 경제 현실과 필요 앞에선 무너지는 셈이다. 정부가 3월 추경안을 편성하며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올해 채무비율은 41.2%이다. 2020년 본예산을 국회에 제출할 당시인 지난해 9월 추산한 값(39.8%)보다 1.4%포인트 올려 잡은 것이다. 이는 2020년 본예산을 편성할 때보다 GDP 증가율(경상성장률) 전망치는 낮아지는 대신 추경으로 채무가 늘어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실제 올해 채무비율은 정부의 이런 예상보다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추경안 편성시 정부가 예상한 올해 경상성장률(3.4%)이 턱없이 높은데다, 추가적인 재정 소요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선 2차 추경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으며 추가 대책에 세수의 큰 폭 감소에 따라 국채 발행 확대로 이어지는 사회보험료 감면이 검토되고 있다. 이를 고려할 때 올해 말 채무비율은 43% 내외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경제 뉴스는 쏟아집니다.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도 어려운 세상입니다. 진짜 뉴스 가운데서도 현상 중계에 그치는 게 태반입니다. 최고의 경제통 김경락 기자가 경제 이슈의 이면에 있는 맥락을 짚어 설명해줍니다. 책이나 논문에 달린 각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