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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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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를 길들이려는 지배층의 필사적 노력

지지율 1위 올랑드 프랑스 사회당 대통령 후보를 무시하는 주변국 정상들, 부자 증세, 금융 및 대기업 규제 등 지지하는 99% 민심을 잠재우려는 시도
등록 2012-03-23 11:06 수정 2020-05-03 04:26

한국이 4·11 총선으로 뜨거운 요즘, 프랑스는 대선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한국 총선 열흘 뒤인 4월22일에 대선 1차 투표가 실시된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5월6일에 결선투표가 치러진다. 제5공화국 헌법 제정 이후 프랑스에서 결선투표 없이 대통령 당선자를 낸 적은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가 결선투표에서 맞붙을지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보통 결선에는 드골주의 우파와 사회당 주자가 올라간다. 사고가 한 번 있기는 했다. 2002년 대선에서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후보가 3위를 해서 결선에 진출하지 못하고, 극우파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펜이 우파 자크 시라크 후보와 맞붙게 돼서 프랑스 사회가 시끄러웠다. 이번에는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선거가 철저히 양강 구도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당 대선 공약의 역사적 흐름
단지 양강 구도일 뿐만 아니라 승자도 어느 정도는 결정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많다. 지난해 10월 프랑수아 올랑드가 사회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 그는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이자 우파의 대표주자인 니콜라 사르코지가 많이 따라잡기는 했다. 하지만 올랑드-사르코지 양자 대결 구도에서는 올랑드가 지금껏 10% 이상의 격차를 유지하며 앞서고 있다.
사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유럽 모든 나라의 선거에서 정권 교체는 거의 철칙이었다. 이념의 좌우를 가리지 않고 여당은 심판 대상이었고 그 반사이익이 야당에 돌아갔다. 프랑스도 이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경제위기에 대한 불만이 ‘정권심판’론으로, ‘반사르코지’ 정서로 치환돼 나타나고 있다. 어느 나라나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은가 보다.
그런데 이번 프랑스 대선에는 좀 ‘다른’ 구석이 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장면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올랑드 후보에 대한 다른 유럽 주요국 정부의 싸늘한 눈길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공공연히 사르코지 지지를 선언했다. 올랑드 후보가 영국 주재 프랑스인들에 대한 선거운동차 런던에 방문했을 때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무시로 일관했다. 독일의 유력지 은 “프랑스·독일·스페인 정부가 올랑드 후보를 ‘왕따’시키기로 묵계했다”는 기사를 내기까지 했다.
전례 없는 일이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라면 당선 이전에라도 국빈 대접을 받는 게 상례다. 더구나 후보 간 상당한 격차를 보이는 타국 대선에 대해 특정 후보(그것도 2위 후보) 지지 의사를 밝히는 것은 누가 봐도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그런데 지금 유럽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고만고만한 작은 나라들 중 하나가 아니라 유럽 제2의 강국 프랑스를 놓고 말이다.
문제는 아무래도 올랑드 후보의 공약에 있는 것 같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당 대선 공약에 분명하게, 혹은 그림자처럼 반영돼 있는 역사적 흐름이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올랑드를 둘러싼 대중적 분위기는 지난 몇십 년간 프랑스 사회당 대선 후보들(조스팽이나 세골렌 루아얄)이 대변하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데가 있다. 독일이나 영국 우파 정부는 이게 못내 불안한 것이다. 도대체 그의 공약이 어떻기에 이러는 것인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우선 문제의 공약이 등장하기까지의 ‘전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지난해 사회당 대선 후보 경선이 그 직접적인 출발점이다. 대선 후보로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성폭행 혐의로 출마를 포기하자, 당내 경선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사회당 역사상 처음으로 비당원들이 대거 참여하는 ‘오픈프라이머리’ 형태로 치러진 것도 흥행에 한몫했다. 이런 경선 과정의 역동성은 2007년 대선 후보이자 올랑드의 옛 동거인이던 루아얄이 7% 정도의 득표에 그쳐 초반에 낙마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기아차가 오는 5월 대형차 K9을 출시한다. K시리즈의 종결자로 평가받는 K9의 성공 여부가 향후 기아차의 사업에 큰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기아차의 K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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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랑드 “진정한 적수는 금융계”

이 경선에서 올랑드가 마르틴 오브리(자크 들로르의 딸이다)를 누르고 대선 후보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런데 정작 돌풍의 주역은 따로 있었다. 1차 투표에서 17%를 얻어 당당히 3위를 기록한 아르노 몽트부르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경선을 시작할 때만 해도 5% 정도의 지지에 그쳤던 그가 루아얄 같은 거물을 누르며 결선투표의 캐스팅보트를 쥐게 된 사실은 누가 봐도 이변이었다.

이런 ‘몽트부르 바람’의 중심에 그의 공약이 있었다. 몽트부르는 평소에도 사회당 안의 ‘젊은 전투파’로 자주 논란의 한가운데에 서곤 했다. 이번 경선에서도 그는 은행을 국유화해 신자유주의 금융세력에 맞서겠다는 공약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사회당의 대선 승리에 암초 노릇을 할 위험천만한 선동으로만 보였지만, 오픈프라이머리에 참여한 많은 시민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몽트부르야말로 금융위기 이후의 프랑스 사회에 사회당이 반드시 던져야 할 비전을 제대로 던진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비록 몽트부르 자신이 아니더라도 사회당 대선 후보라면 그게 올랑드든 오브리든 이런 분위기의 대변자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됐다.

올랑드 후보는 올해 1월 대선 공약 ‘프랑스를 위한 60가지 우선 정책’을 발표했다. 1981년 대선에서 또 다른 프랑수아(미테랑)는 ‘프랑스를 위한 110가지 제안’이라는, 비슷한 제목의 정책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110가지 제안’에는 ‘9대 제조업 그룹과 주요 은행 국유화’도 포함됐다. 그때의 프랑수아는 집권 뒤 1년 만에 이 공약을 모두 실제 집행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60가지 우선 정책’ 안에는 ‘국유화’라는 단어가 없다. 몽트부르의 ‘은행 국유화’ 공약은 일단 물밑으로 잠복했다. 하지만 몽트부르의 공약이 뜨거운 박수를 받은 분위기 자체는 이번 대선 공약 안에 뚜렷이 새겨져 있다. ‘60가지 우선 정책’은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엄격히 분리하자고 한다. 신자유주의의 핵심 주체인 금융세력에 족쇄를 채우겠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금융거래에 과세하자고 한다. 민간은행을 국유화하지는 않지만, 대신 공공투자은행을 새로 설립해 금융에 적극 개입하겠다고도 한다. 올랑드 후보는 이러한 경제 공약의 노림수를 한 문장으로 간단명료하게 요약한다. “나의 진정한 적수는 금융계에 있다.” 사르코지가 아니라 말이다.

그렇다고 올랑드 후보의 공약이 경천동지할 만큼 급진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조심스럽다고 해야 맞다. 과거 ‘110가지 제안’ 식의 국유화 공약만 빠져 있는 게 아니다. 1981년에 약속했던 케인스주의적 재정확대 정책도 이번에는 수줍게 얼굴만 비치는 수준이다.

지배층, 대중 움직임에 더 근본적 우려

교육 분야에서 6만 명을 새로 채용하고, 젊은이들에게 15만 개의 새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우파 정부 아래서 연장되었던 정년을 미테랑 시절처럼 60살로 돌리겠다고도 한다. 60만 가구를 대상으로 에너지 효율화와 기후변화 대비를 위해 공적인 주거 리모델링 사업을 벌이겠다는 공약도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대대적인 공공투자나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 같은 것은 없다. 좌파 후보가 으레 약속하던 최저임금이나 복지급여 인상은 이번에는 자취도 없다. 적자재정으로 읽힐 수 있는 공약은 모두 철저히 제외됐다.

대신 ‘균형’ 재정을 강조한다.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곳곳이 재정위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정도 내용인데도 우파 후보들은 사회당 공약이 재정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공격하는 형편이다.

한데 다름 아닌 이 ‘균형’ 재정론이 또 다른 방향에서 기득권 세력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60가지 우선 정책’이 재정 균형을 달성할 방법을 복지 지출 삭감이 아니라 세수 확대에서 찾기 때문이다. 향후 5년간 공약 실현에 필요할 200억유로(약 30조원)를 확보할 방안은 세제 신설과 최고세율 인상, 각종 면세제도 철폐의 기다란 목록이다. 위에 이미 소개한 모든 금융 거래에 대한 과세도 그중 하나다.

프랑스의 부유층에게는 한마디로 ‘세금 폭탄’이라 할 만하다. 올랑드 후보의 공약대로 된다면, 15만유로(약 2억2천만원) 이상 소득자는 최고세율이 40%에서 45%로 오르게 된다. 대기업의 경우는 법인세가 35%로 늘게 된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중이 높은 기업도 더 많은 세금을 물게 된다. 부유세도 인상될 예정이다.

반면에 소득공제 총액은 1인당 1만유로를 넘을 수 없게 된다. 40억유로에 달하는 정부의 대기업 지원 프로그램도 폐지될 것이다. 이렇게, 중간층 이하의 과세 부담은 줄이거나 동결하되, 부자 증세를 철저히 실시한다는 것이 사회당의 방침이다.

벌써부터 부자들이 프랑스를 떠나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같은 프랑스어권인 이웃 벨기에·스위스 등으로 국적을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기득권층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지 사회당 올랑드 후보의 당선만이 아니다. 당선자가 선거 공약을 실제 추진할 수밖에 없게 만들 대중의 움직임이 더 근본적인 우려 대상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설령 올랑드 정부가 들어서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자 증세와 금융 및 대기업 규제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지금 유럽의 우파 정부들이 경계하거나 훈육하려 하는 것은 단순히 올랑드 후보 개인이나 프랑스 사회당이 아니다. 참으로 두려운 ‘야수’는 올랑드 선거운동의 배후에 도사린 ‘99%’의 격앙된 민심이다. 프랑스 대선을 둘러싼 주변국 정상들의 무례한 반응은 이 야수를 길들이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보여준다.

여러 나라 선거의 신호탄이 될 듯

더구나 이번 대선을 시발로 2013년까지 유럽 곳곳에서는 정권의 향배를 결정할 주요 선거가 잇따를 것이다. 4~5월 대선 결과가 프랑스 한 나라에 그치지 않고 이후 다른 여러 나라의 선거에 신호탄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당장 몇 달 뒤 있을 그리스 총선에 바람을 몰고 올 것이고, 유럽 재정정책에 대한 아일랜드 국민투표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며, 내년 독일 총선에도 커다란 변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초장에 야수를 제압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하지만 그게 과연 쉽게 가능할 것인가. 선거 결과가 초국적인 사회 세력 관계의 격동, 더 나아가 역사의 심원한 방향 전환과 맞물릴지 모른다는 이 소름 끼치는 전망 앞에서 초조와 우울이 지금 유럽 엘리트들의 밀실을 엄습하고 있다.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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