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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건 못 참아 패션 브랜드 ‘쌈지’

등록 2006-11-24 00:00 수정 2020-05-03 04:24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뭔가 독특하고 새로운 이름으로 해보자 싶었죠.” 천호균(57) 사장이 1993년 레더데코(‘쌈지’ 전신)를 설립해 가죽 제품 제조업을 시작할 때 브랜드 이름을 한글로 짓기로 한 것은 차별화 전략이었다. 패션업계에 외국말 표현이 너무 많다 보니 우리말 브랜드가 오히려 돋보일 것이란 판단이었다.

한글 브랜드를 만들자는 데는 직원들 사이에도 쉽게 공감대가 이뤄졌지만, 똑 떨어지는 작품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당시 거론됐던 후보 이름으로는 ‘첫사랑’ ‘첫날밤’ ‘신사임당’도 들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천 사장의 부인인 정금자(53) 쌈지 디자인총괄 이사가 ‘쌈지’ 얘기를 꺼냈다. 평택 청담중학교 윤리 교사 출신인 정 이사는 당시 레더데코 디자인실장으로 이미 경영에 참여하고 있었다. 쌈지는 속담에서 자주 쓰여 친숙할뿐더러 회사의 주력 제품인 핸드백의 기능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데도 더없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그 다음날 바로 브랜드명으로 채택했다.

쌈지는 레더데코의 주력 브랜드로 떠올라 1999년엔 아예 회사 이름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초창기에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핸드백에 한글로 ‘쌈지’라고 써놓았더니 지워달라고 하는 소비자들이 있었습니다. 싸구려 같다고(웃음)…. 그래서 한글 브랜드는 2~3년 쓰다가 안 쓰게 됐지요.” 천 사장은 그래도 쌈지 브랜드를 포기하지 않고 한글 표기 대신 ‘SSAMZIE’라는 영어 표현을 채택해 브랜드의 부활을 꾀했다. 레더데코는 당시 주류를 이루던 핸드백 제품과 다른 형태를 선보여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딱딱한 재질의 네모난 핸드백 대신 의류용 가죽으로 만들어 흐느적거리는 무형의 핸드백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판매 방식도 남달랐다. 핸드백 매장에서 목도리, 장갑, 선글라스 같은 패션 제품을 같이 모아 파는 게 당시로선 낯선 방식이었다.

쌈지를 도드라지게 한 또 하나의 전략은 예술을 사업의 도구로 활용한 이른바 ‘아트 마케팅’이었다. 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을 통해 이미지를 높이는 차원을 넘어 아예 예술 자체를 경영과 연결시키는 전략으로 쌈지는 자주 화제를 뿌렸다. 한 예로 팝아티스트 낸시 랭을 1년 임기의 ‘아트디렉터’(예술이사)로 영입한 것을 꼽을 수 있다. 낸시 랭이 만든 핸드백 브랜드 ‘매직박스’는 드라마 에서 탤런트 윤은혜가 들고 나와 눈길을 끌기도 했다. 아티스트들에게 작업실을 무료로 빌려주는 지원책 대신 작품을 받는 방식 또한 아트 마케팅의 한 예다. 쌈지라는 브랜드가 지금껏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이런 아트 마케팅에 힘입은 바 컸다고 천 사장은 말한다.

부인과 함께 (주)쌈지를 이끌고 있는 천 사장은 경기중학교 시절 갖가지 짓궂은 일화를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경기고 시절에는 권투선수 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싸움을 잘했고 대학교(성균관대 영문학과) 때는 바둑 카페를 차린 일도 있었다. 남들과 같거나 평범한 건 도무지 견디질 못하는 성미 속에 독특한 브랜드 이름이나 경영 전략이 씨앗으로 자라고 있었던 듯하다. 1981년 근무하던 대우중공업을 떠나 가죽 제품 수입업체를 차리면서 ‘호박상사’로 이름지은 데서 그의 익살이 잘 드러난다. ‘호박’은 학창시절부터 그를 따라다니는 별명이었다고 한다. 호박 같은 생김새와 둥글둥글한 성격을 아울러 담고 있다며 웃는 천 사장에게서 (주)쌈지의 경영 분위기가 뚝뚝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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