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기펠(Gipfel). 1997년 삼성전자가 국내업체로는 처음으로 양문형 냉장고 출시를 앞두고 제일기획으로부터 제안받은 브랜드명 후보군에서 단연 눈길을 끈 것은 ‘최고’라는 뜻의 독일어 ‘Gipfel’이었다. “영어, 불어 브랜드명도 있었는데, 고급스럽고 독특함에서 Gipfel이 돋보였다.”(구자익 글로벌마케팅실 부장) 구 부장은 당시 국내영업사업부 광고과장으로, 새로 출시되는 양문형 냉장고의 브랜드 전략 실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구 부장은 “외제품이 장악하고 있던 프리미엄급(고급) 가전시장에 처음 론칭(출시)하는 국산품이어서 브랜드 이름을 정할 때도 고급스러움과 독특함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구 부장을 비롯한 실무진은 독일어 사전을 뒤지는 과정에서 우연히 기펠(Gipfel)과 똑같은 뜻을 갖고 있으면서 철자만 조금 다른 지펠(Zipfel)을 발견했다고 한다. G보다는 Z가 더 고급스럽고 독특하게 들린다는 의견이 나온 게 이즈음이었다.
실무진은 Zipfel 쪽으로 의견을 모은 뒤 사내 공론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된다. Zipfel이 ‘최고’ ‘정상’ ‘꼭대기’ 같은 일반적인 뜻 말고 속어로 ‘남성의 은밀한 부분’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웬만한 독일어 사전에는 나와 있지도 않고 독일 주재 직원들조차 모르는 이 말뜻을 귀띔해준 이는 독일인 바우만 과장이었다. 영국에 있는 구주총괄본부 마케팅 담당자인 바우만 과장은 독일 현지 채용인으로, 당시엔 한국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삼성전자 양문형 냉장고의 브랜드명이 f가 빠진 Zipel로 최종 결정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p, f의 발음이 중복돼 ‘냉장고의 최고’라는 뜻을 살리는 데는 어차피 큰 문제가 없었다. 삼성전자는 그래도 자칫 성적인 연상과 구설을 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ZIPEL을 이니셜(첫 글자)로 삼는 새로운 뜻을 만들어내는 전략을 썼다. ‘완벽한 품질’(Zero defect)로 ‘지성’(Intelligent)과 ‘명예’(Prestige)를 중시하는 고객에게 ‘우아하고’(Elegant) ‘품격 있는 생활’(Life style)을 약속하는 프리미엄 브랜드라고 내건 것이다.
삼성전자는 1997년 4월 ‘지펠’을 처음 출시하면서 ‘삼성’이란 이름은 의도적으로 뺐다. GE·월풀 등 외국산 제품들에 대한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시장 형편에서 국산품 이미지로는 시장 진입조차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만 해도 ‘삼성’ 브랜드의 위상은 지금처럼 높지 않았다. 더욱이 삼성그룹에는 전자뿐 아니라 건설·물산 등 여러 복합적인 사업 영역이 포괄돼 프리미엄 브랜드라는 인상을 풍기기엔 불리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했다. 이 때문에 초창기엔 지펠을 독일 브랜드로 아는 소비자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올해로 출시 10년을 맞은 지펠은 이제 시장점유율 55~60%를 차지할 정도로 냉장고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지난해 11월 미국의 시장조사기관인 JD파워의 ‘2005년 주방·가전기기 소비자만족도’ 조사에서 냉장고 브랜드 중 1위를 차지하고, 올 1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인 CES에서 최고혁신상을 받기도 했다. 냉동·냉장에 맞도록 냉각기를 각각 따로 두어 냉동·냉장실의 냉기와 음식 냄새가 섞이지 않도록 한 ‘독립냉각’ 방식이란 기술에 바탕을 두고 최고를 지향하는 독특한 마케팅 전략을 편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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