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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뱅, 청바지의 독립선언

등록 2006-08-19 00:00 수정 2020-05-03 04:24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뱅뱅’ 브랜드로 첫 국산 청바지가 생산된 것은 1970년이었다. 면바지에 파란 물감을 들인 탓에 빨기만 하면 줄어드는 가짜 청바지와 미군 부대를 통해 흘러나온 밀수 청바지가 판을 치던 시절이었다.
당시 제조사는 (주)뱅뱅어패럴의 전신인 제일피복이었다. ‘국내 섬유업계의 대부’ ‘청바지 전도사’로 통하는 권종열(73) 뱅뱅어패럴 회장이 1961년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시작한 의류업체에 뿌리를 둔 회사였다.

뱅뱅(BANG BANG)은 본래 홍콩 브랜드였다고 한다. 영어의 ‘총소리’ 표기에서 따온 것일 뿐 특별한 뜻을 담은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의류업으로 성가를 높인 권 회장이 홍콩 업체의 폐업 뒤 이 브랜드를 갖다 썼다고 전한다. 당시만 해도 지적재산권 규정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다.

뱅뱅 브랜드가 폭발적인 인기를 끈 계기는 1982년의 ‘교복 자율화’ 조처였다. 이듬해 서울 강남 지역에 사옥을 건립하고, 1986년 뱅뱅 브랜드를 떼내 별도 회사로 독립시킨 데서 이런 사정을 엿볼 수 있다.

뱅뱅 브랜드의 마케팅 전략에서 두드러진 점은 당대 최고의 톱스타를 광고모델로 기용한 것이었다. 처음 TV광고를 한 1983년 당시 모델은 가수 전영록이었다. 이 광고는 뱅뱅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사옥이 입주한 주변 거리에 ‘뱅뱅사거리’라는 이름이 붙은 게 이 무렵이었다. 전영록에 이어 박중훈, 신성우, 강산에, 조성모가 뱅뱅 광고모델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최근엔 권상우와 하지원 콤비의 광고를 선보이고 있다.

뱅뱅어패럴의 김영조 홍보팀장은 “권상우씨의 일본 팬클럽 회원들이 매장에 단체로 와서 옷을 구입하는 일이 많다”며 웃었다. 하지원씨의 국내외 팬들은 브랜드의 개선점을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보내오기도 하는 등 톱스타 광고전략은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자랑한다.

뱅뱅어패럴 쪽은 광고 효과의 바탕에는 제품력이라는 질적인 요소가 깔려 있었다고 강조한다. 방직업체 태창과 손잡고 수입품을 뛰어넘는 원단을 개발 활용했다는 것이다. 권 회장이 만든 첫 국산 청바지도 당시 태창에서 수출하다 남은 청바지 원단을 활용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10년 동안 옷장사를 해온 권 회장은 제대로 된 청바지를 만드는 게 꿈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뱅뱅은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외국의 유명한 청바지 브랜드들이 밀려든 탓이었다. 이 시기 비슷한 상호인 ‘뼝뼝’이 부도를 낸 게 와전되면서 뱅뱅도 덩달아 어려워지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외환위기의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신규 브랜드로 야심차게 내놓았던 여성복 사업을 포기해야 했고, 300개였던 대리점이 100개로 줄어들었다.

뱅뱅어패럴은 중국 진출에서 활로를 찾았다. 국내 의류업체로는 선도적으로 1992년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겨 현재 베이징, 칭다오 등 10곳에 공장을 갖고 있다. 의류라는 한 우물을 파면서도 제품 구성은 다양화함으로써 한때 70~80%를 차지했던 청바지 비중은 20% 안팎으로 줄었다. 뱅뱅어패럴은 2004년 매출 1590억원에서 2005년 1682억원, 올해는 1800억원(예상)으로 꾸준히 성장하며 ‘섬유업은 사양업’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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