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세계 평화를 위한 근육 영애의 당부

‘놓친 물고기는 컸지만 잡은 물고기가 너무 컸던 건’이 보여주는 꿈같은 세상
등록 2026-10-22 20:08수정 2026-10-24 15:48
주인공 ‘마리아’는 체력이 주는 힘이 싸우며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지키며 더해지는 것임을 일깨운다. 즉, 약자를 세계 밖으로 내모는 대신에 힘을 합쳐 서로를 지키게 하는 것이다. 대원씨아이 제공

주인공 ‘마리아’는 체력이 주는 힘이 싸우며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지키며 더해지는 것임을 일깨운다. 즉, 약자를 세계 밖으로 내모는 대신에 힘을 합쳐 서로를 지키게 하는 것이다. 대원씨아이 제공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찼냐’는 말이 있다. 머리보다 힘을 우선하는 사람, 대충 말해 무식하게 힘만 센 사람을 욕하는 말이다. 실제 그런 성향의 사람에겐 모욕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근육량이 평균에도 못 미치는 나로선 제발 그래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든다. 머리보다 힘이 앞설 정도로 강해 보고 싶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부터 나갈 만큼 내 몸이 믿음직해져 보는 게 소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세상은 대체 어떻게 다가올까?

 

주먹이 먼저 나가는 세계

 

‘놓친 물고기는 컸지만 잡은 물고기가 너무 컸던 건’(나가토 카키, 대원씨아이)은 주인공 ‘마리아’(이하 애칭 미미로 지칭)를 통해 그 꿈같은 세상을 엿보게 한다. 제목이 굉장히 길고 뭔 소리인가 싶은데, 실제 내용도 만만치 않게 독특하다. 미미는 근육질의 귀족 영애다. 대단한 무예 가문의 후계자로 길러졌지만 막내아들이 태어나면서 집안을 이을 필요가 없어졌고, 늦게라도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이웃 나라로 떠난다. 등장하는 악역마다 한주먹에 쓰러뜨릴 만큼 힘센 여주인공을 그려놓고 3살짜리 남동생에게 가문을 양보해야 한다니. 웬 열린 듯 닫힌 이상한 세계관인가 싶지만, 어쨌거나 그 독특한 출발 덕에 다른 로맨스 판타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재미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일단 미미가 착용하는 가문의 긍지가 담긴 머리 장식, 자세히 보면 너클이다. 위기의 순간 손에 걸어 주먹을 갈길 때 쓰는 그 너클 말이다. 왈츠랍시고 추는 춤도 무용이라기보단 무술에 가깝고, 체중 관리를 목적으로 발목에 15㎏짜리 족쇄를 차고 다닌다. 곧 한 나라의 왕비가 될 예정인데 회차를 거듭할수록 전투력이 상승하는 중이다. 그 강건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 미미의 머리에 근육만 가득하다 해도 ‘역시 그랬구나’라고 할 것 같다. 놀랄 시간에 어떻게 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미미는 단순하고 명랑하고 강인하고 활기차다. 비평을 쓰며 인물을 묘사하는 게 이렇게 간단한 적이 있었나 싶은데, 소개말이 명쾌하단 사실이야말로 이 영애를 잘 설명해준다. 독자도 주변 인물도 미미를 따라 단순해지게 만든다. 왕태자로서 책임에 짓눌려 잠 못 이루던 약혼자 ‘레나토’나, 연적을 뺏겠다며 계략을 도모하던 타국의 공주 ‘안셰린’, 후계자를 바꿔버린 것에 미안해하던 미미의 아버지 모두 단단하고 판판한 그 앞에서 맑게 갠다. 어지간한 근심과 상념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가볍고 단순해진 만큼 낙관할 용기가 들어찬다.

주인공 ‘마리아’는 체력이 주는 힘이 싸우며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지키며 더해지는 것임을 일깨운다. 즉, 약자를 세계 밖으로 내모는 대신에 힘을 합쳐 서로를 지키게 하는 것이다. 대원씨아이 제공

주인공 ‘마리아’는 체력이 주는 힘이 싸우며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지키며 더해지는 것임을 일깨운다. 즉, 약자를 세계 밖으로 내모는 대신에 힘을 합쳐 서로를 지키게 하는 것이다. 대원씨아이 제공


강해지고 싶다는 말의 무게

 

체력이 있었으면 무엇이 더 가능했을까? 친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취소하지 않아도 됐을까? 하루를 허무하게 낭비하는 날이 더 적었을까? 내가 나로 사는 일에 조금은 덜 지쳤을까? 이런 질문을 할 때 ‘조금은’ 같은 말을 붙이지 않을 만큼 과감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어쩌면, 세계 평화를 포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질문의 답을 얻지 못한 채 영원히 망상에만 머물게 된다는 게 근육보다 머리가 앞서는 사람의 비극일 것이다.

다정은 정말 체력에서 올까? 알고 싶지 않아 진위를 찾아보진 않았지만, 듣자마자 기분 상하는 말이다.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체력 좋은 사람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특혜를 누리는지 체력 좋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누군가 최선을 자처하는 일이 언제나 좋은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 한도 없는 최선은 사회의 속도와 강도를 높이고, 허약한 사람들을 도태와 낙오의 자리로 내몬다. 이런 불평을 하면 역시 체력 나쁜 놈이 성격까지 꼬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 말이 그만 유행했으면 좋겠다. 평화마저 강자들에게 달렸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그런데 요즘 내게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 헬스를 다녔더니 근육이 500g 늘었다. 너무 힘들었던 터라 2㎏은 늘어난 줄 알았기에 충격받았지만, 어쨌든 근육 500g만큼의 혜택을 누리는 중이다. 갑작스레 마주친 계단을 조금 덜 싫어하게 되었고, 힘을 줘서 단단해진 팔뚝을 두드리는 일은 아무래도 질리지 않는다. 몸의 힘이 주는 달콤함을 어설프게나마 경험하니, 더 욕심이 난다. 하루의 끝에서 기진맥진하고 싶지 않다. 체력이 달려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져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단 시작부터 해보자고 말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겨우 귀퉁이만이라도 좋으니, 미미가 바라보는 세상을 나 또한 경험해보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지금, 사실 내 마음은 갈등하고 있다. 체력이 가져다준 가능성의 세계를 무한히 누리고 싶은 마음과 그 세계에 입장조차 못한 이들을 배신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힘을 숭상하는 세상이 약한 이들에게 얼마나 잔인한지 알면서, 함부로 강해지고 싶다고 말해도 될까? 당장 근육이 자라는 추세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걱정일 수도 있겠지만, 진지하게 나는 강해지지 못할 것만큼이나 강해졌다고 약한 이들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것이 두렵다.

주인공 ‘마리아’는 체력이 주는 힘이 싸우며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지키며 더해지는 것임을 일깨운다. 즉, 약자를 세계 밖으로 내모는 대신에 힘을 합쳐 서로를 지키게 하는 것이다. 대원씨아이 제공

주인공 ‘마리아’는 체력이 주는 힘이 싸우며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지키며 더해지는 것임을 일깨운다. 즉, 약자를 세계 밖으로 내모는 대신에 힘을 합쳐 서로를 지키게 하는 것이다. 대원씨아이 제공


작은 근육으로 지킬 수 있는 것

 

“전하는 남들보다 센 완력과 권력을 갖고 계세요. 전하가 주는 아픔은 그보다 더 크다는 걸 기억해주세요. 그 아픔을 결코 잊으시면 안 됩니다.” 난생처음 사람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본 레나토를 향해 미미가 건넨 말은, 마치 강해질 앞으로의 나를 위해 준비해둔 말처럼 들린다. 정말 강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강함만을 믿고 한정 없이 힘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힘의 위력을 고스란히 책임의 무게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 강자가 힘을 이렇게 쓰는 세상이라면, 약한 것이 반드시 원통한 일은 아닐 수 있지 않을까.

자기보다 약한 남자와 결혼한다는 딸에게 따져 묻는 아버지를 향해, 미미가 건넨 대답은 그의 세상을 좀 더 지지하게 한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보호를 받는다고?” “그래. 모두 안심하고 날 지킬 수 있도록 내가 모두를 지킬 거니까.” 왜 싸워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미미의 말은 한 방향으로만 굳어 있던 힘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휘저어줬다. 강인한 신체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 쓰는 미미의 세상에서, 힘이란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더해지는 것이다. 약자를 세계 밖으로 내모는 대신에 힘을 합쳐 서로를 지키게 한다. 그런 세상이라면 나도 욕심을 품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머리끝까지 근육으로 가득 차는 것도 멋질 테지만, 500g의 근육으로 꿈꿔볼 수 있는 평화도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최윤주 만화평론가

 

*현실 연애엔 무관심하면서도 로맨스 만화는 가세가 기울 만큼 읽어왔다. 그 경력을 살려 다양한 관점에서 로맨스 만화를 읽어보려 한다. 6주마다 연재.

한겨레 저널리즘을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