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펙트 월드’는 작가의 예상을 뛰어넘어 긴 연재 끝에 12권으로 마무리됐다.
관람일이 돼서야 배리어프리 영화가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일상이 된 자막은 익숙했지만, 사소한 장면에까지 따라붙는 음성 해설과 한국어 더빙은 미처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한 구성임에도 예측 못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처음 경험하는 배리어프리 영화가 상상 이상으로 불편해 또 한번 놀랐다. 끊임없는 해설과 정보가 뒤섞인 자막, 영상 이미지가 동시에 쏟아지니 처리해야 할 정보량이 너무 많았다. ‘장벽을 없애는’(Barrier-free) 영화인데 하나하나가 장벽처럼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진부한 깨달음이지만, 그렇게 낯선 형태로 영화를 경험하고 나서야 내가 이용해온 영화관이 누구를 위해 최적화된 공간이었는지를 되짚게 됐다. 배리어프리가 단순히 걸림돌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판을 짜는 것에 가깝겠다는 깨달음과 함께, 내 생활공간에 장애의 침투력이 얼마나 희미한지를 실감했다. 만화 ‘퍼펙트 월드’(아루가 리에 지음, 학산문화사 펴냄)를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런 얼얼한 기분으로 상영관을 나서면서였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첫사랑이었던 이쓰키는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만화 ‘퍼펙트 월드’가 자기소개를 위해 써놓은 가감 없는 설명이다. 설명대로, 이 작품은 사고로 척수 손상을 입은 장애인 남성과 비장애인 여성이 주인공인 로맨스다. 첫사랑 이쓰키와 재회한 쓰구미는 그의 장애 때문에 마음을 열기를 주저하면서도, 얼마 안 가 다시금 사랑에 빠진다. 장애를 얻은 뒤 연인을 만들 생각이 없게 됐다는 이쓰키의 말에 쓰구미는 ‘사랑한다면 극복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낭만적인 로맨스에서 흔히 나올 법한 대사 뒤에 나오는 이쓰키의 대답은 ‘퍼펙트 월드’라는 작품을 단번에 각인시킨다. “나는 가끔 똥이 샐 때도 있어.”

만화 ‘퍼펙트 월드’의 한 장면. 학산문화사 제공
장난처럼 들려온 말에 당황하는 쓰구미에게 그는 차분히 덧붙인다. “아무리 조심해도 어쩔 수 없어. 그런 일이 평생 이어지는 거야. 그냥 현실이 그렇다는 거야.” 1권 초반에 놓인 이 짧은 장면은 장애를 결코 호락호락하게 그리지 않겠다는 선언 같다. 실제로 작품엔 욕창과 카테터(의료용 도관) 삽입 등 이쓰키가 살아내는 현실의 순간들이 숨김없이 그려진다. 어떻게 하면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극복하지 못했다고, 장애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이쓰키의 고백 역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이 고백은 ‘취지만 좋았던’ 작품에 종종 배신당해온 나를 안심시켰는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바로 그 때문에 몇 년이나 다음 권 읽기를 미루게 됐다. 좋은 작품일 거라 확신하면서도, 이토록 현실적인 작품을 무감히 읽어낼 자신이 없었다. 그건, 조금 비약을 더하자면 장애에 관해 말 얹길 주저하던 내 모습과 무관하지 않았다. 장애에 관해 공식적인 글을 쓰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당사자성은커녕 장애인이 배제된 공간에만 익숙한 내가 장애를 이야기하는 것이 자격 미달의 일처럼 느껴졌다. 실제 그런 자격의 존재 여부와는 별개로, 이렇게 과잉된 자의식으로는 적절한 글을 쓰기 어려워 보였다.
그랬던 내가 ‘퍼펙트 월드’를 다시 꺼낸 건, 미루고 싶지 않을 만큼 선명해진 질문 때문이다. 은유가 아닌 현실의 차원에서, 배리어프리 상영관에서 경험한 시공간을 영화관 밖으로도 가져오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주저하던 사이 작품은 완결돼, 마지막 12권의 표지에서 두 주인공이 아이의 손을 잡고 활짝 웃고 있었다. 대체 그 결말에 어떻게 이르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쓰구미에게 그 대답이 있을 것 같았다. 이쓰키와 세계를 공유하고 싶어 막막한 질문을 반복하던 그의 모습이 앞선 질문과 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이쓰키에게 의지가 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원망하는 쓰구미를 보며 나의 일상화된 두려움을 읽기도 했다. ‘내가 내 인생을 언제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내 주변인을 돌보는 게 가능할까?’ 장애와 질병, 노화를 동일시할 순 없지만, 누구나 그런 두려움 속에서 충분히 유능하거나 건강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곤 한다. 작품을 읽다 마주한 두려움에 엉엉 눈물이 나기도 했는데, 두 사람의 여정을 따르는 것만으로 두려움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다만 끝까지 읽어가는 과정에서 작가의 존재감이 새롭게 다가왔다. ‘퍼펙트 월드’는 비장애인인 쓰구미가 이쓰키의 세계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갈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인 동시에, 비장애인 작가가 장애인의 세계를 묘사하기에 걸맞은 언어를 발굴해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작가는 장애인과 연인이 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주저하던 쓰구미의 마음이 곧 이야기의 출발점에서 품은 자신의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처음 단편으로 기획됐던 ‘퍼펙트 월드’는 장편이 됐고, 작가의 예상보다 긴 연재를 이어가다 12권에서 마무리됐다. 작가가 그려낸 세계에서 처음부터 예정된 것은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예상보다 길어지고 계획보다 복잡해진 세계를 가능하게 한 것은 성실한 취재였다. 휠체어 사용자의 실제 사정, 인공수정 실패 후 입양을 통한 육아, 결혼하는 두 사람과 하객들이 휠체어를 탈 수 있는 결혼식 등, 발굴하듯 그려진 장면 모두는 취재에서 비롯된 이야기였다. 장애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고백한 이쓰키와 달리, 장애가 있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으며 장애 때문에 불행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미나미와 하루토는 ‘퍼펙트 월드’를 읽던 장애인 독자의 후기에 출처를 둔다.
쓰구미와 이쓰키는 추궁당한다. 장애와 합병증을 감당해야 하는 지난한 일상과 가혹한 시선에도 끝까지 서로를 사랑하며 행복할 자신이 있는지. 장애를 이야기하면서 하필 ‘사랑’과 ‘행복’을 묻는 것은 로맨스라는 장르의 태생적 특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안일한 이야기로 느껴지리라는 생각도 스쳤다. 하지만 이 작품은 관념의 차원에서 적당히 묻고 끝내지 않는다. 각자의 행복이, 결국 이 사회를 어떤 공간으로 만들어갈지를 논의하기 위한 협의의 언어로 읽혔던 것은 그래서였다.
떠올릴 때마다 후회하는 순간이 있다. 몇 년 전, 암에 걸린 친구를 만나고 역 앞에서 헤어지는 순간 나는 정말이지 바보 같게도 ‘건강하자’는 말을 인사로 건넸다. 무심한 습관을 따른 말이었고 주워 담을 길은 없었다. 그 친구에게 다음 인사를 건넬 수도, 얼룩처럼 남은 미안함을 지울 방법도 없는 것을 인정하지만, 내게 다른 인사의 말이 있었다면 정말 좋았겠다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퍼펙트 월드’를 연재하며 세계가 재편되고 그에 걸맞은 언어를 찾아나간 작가가 부러웠다. 그런 세계를 나도 알았다면 다른 인사를 건넬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경솔하고 기울어진 언어로 쓰인 이 글 역시 결국은 후회를 남길 것이다. 그러나 아직 모르는 세계에서 쓰일 더 적절한 인사를 익힐 수 있다면, 이런 후회는 감수할 수 있을 것 같다.
최윤주 만화평론가
*현실 연애엔 무관심하면서도 로맨스 만화는 가세가 기울 만큼 읽어왔다. 그 경력을 살려 다양한 관점에서 로맨스 만화를 읽어보려 한다. 6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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