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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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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꼭 그래야 하나요?

‘로맨스’에서 만난 지극히 개인적이되 사사롭지 않은 발견들
등록 2025-08-14 22:17 수정 2025-08-21 11:50
웹툰 ‘어쩌면, 사랑’ 속 한 장면. 사랑을 둘러싼 고정관념에 질문을 던지며, 타인을 대하고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작품이다. 카카오웹툰 제공

웹툰 ‘어쩌면, 사랑’ 속 한 장면. 사랑을 둘러싼 고정관념에 질문을 던지며, 타인을 대하고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작품이다. 카카오웹툰 제공


종종 인생에도 장르가 있을까 생각한다. 하는 일이 장르를 경유해 수백 수천 개의 삶을 만나는 일이라 그런지, 죽은 뒤 묘비명을 상상하듯 한번씩 고민하게 된다. 그렇지만 장르를 논하기가 민망할 만큼 시시한 인생, 너그럽게 봐주면 성장물쯤 될까. 운이 좋아 스릴러와 오컬트는 피했지만 판타지로 살 만큼 특출난 행운을 부여받지는 못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대중적이지만 내 인생은 아닌 장르가 있다. 바로 로맨스다. 테이블에서 연애 이야기가 시작되기만 해도 관심 없는 티를 안 내려 애써야 하고, 신년운세를 보러 가서도 연애운은 물은 적이 없다. 그런 불성실에 부응이라도 하듯, 아무 일도 없던 것은 아니지만 별일은 없는 채로 지금이 됐다. 하지만 그런 나도 20대 초반엔 사랑, 조금 더 정확히는 연애에 대해 묻고 다녔다. 불만이 많았던 탓이다.

인물들 교차하며 ‘사랑의 정의’ 점검

스무 살에 마주한 연애라는 것은 화장과 꼭 같은 거여서, 어제까진 하지 말라 해놓고 오늘은 왜 하지 않냐 따져 물어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성년의 날 선물로 립틴트를 받아 솔직히는 모멸감을 느꼈던 적이 있다. 화장하지 않는 데는 내심 저항의 의미가 있었는데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느낌으로, 곧 연애할 수 있을 거란 수요 없는 덕담은 격려도 위로도 되지 못한 채 불쾌감만을 안겼다. 연애가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는 것이 의아했고, 여러 관계 중 유독 특별히 취급하는 분위기 속에서 뭔가를 침범받는다고 느꼈다. 대체 ‘사랑’을 모르는 것이 어째서 미성숙한 것이 되는지. 강요와 압박으로 누적된 불만을 담아 기회 있을 때마다 따지듯 묻곤 했다.

모우 작가의 ‘어쩌면, 사랑’(카카오웹툰, 2015∼2016년 연재)을 보면 질문으로 가득 차 있던 그때가 떠오른다. 사랑을 둘러싼 고정관념에 질문을 던지며 타인을 대하고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을 조심스럽게 고민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인 주인공 ‘우영’은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풀리지 않는 질문에 골몰하는 중이다. 그는 입학식 날의 우연한 계기로 국어 교사인 ‘석훈’을 좋아하게 됐는데, 선생님을 향한 학생의 호감이 인정되긴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영은 이런 일에 화내지 않는 차분하고 사려 깊은 성격이어서, 다만 자신의 감정을 부정한 석훈에게 도리어 질문을 건넨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이 가짜인 게 되나요? 무엇이 사랑이고 아닌지 어떻게 확신하나요?’

만화는 사랑의 정의를 점검하기 위해 서로 다른 조건의 사람들을 교차시킨다. 이를테면 우영의 친구 ‘설민’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금세 사랑에 빠지는 인물이다. 연극부 아이를 좋아하니 같이 연극부에 들어가자며 부탁해놓고선 막상 연극부에 들어가니 그새 좋아하는 사람이 바뀌었다는 식이다. 주변에선 그를 너무 가볍다고 하고 사실은 설민 역시 자기감정에 자신이 없다. 석훈의 사랑은 그 반대지만 고민하는 모습만큼은 설민과 닮았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족처럼 지낸 이와 자연스레 연인이 됐으나 헤어졌고, 당연하게 생각해 의심조차 하지 않고 맺어졌던 관계가 정말로 사랑이었는지 뒤늦게 의심을 품는다.

‘어른’인 석훈이 지난 경험을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은 질문을 거듭하면서도 끝내 석훈을 향한 감정을 인정해낸 ‘어린’ 우영의 모습과 대비되며 사랑의 정의를 되묻게 한다. 이 되물음은 사랑에 관한 경직된 통념에 가해지는 균열인 동시에, 사랑을 정의하는 ‘자격’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특정한 조건의 누군가가 어떤 관계만을 사랑으로 인정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하는 질문 말이다. 작품은 ‘미성숙한’ 청소년과 ‘성숙한’ 어른을 중심으로 그 물음을 제시하지만, 이는 훨씬 더 많은 사연과 맥락 속에서 유의미하게 되짚어질 만하다.

카카오웹툰 제공

카카오웹툰 제공


자칫 버려질 고민과 감정도 소중한 이유

사실 ‘어쩌면, 사랑’이라는 작품은, 내게 20대만이 아니라 10대 시절도 떠오르게 한다. 그때도 나는 불만과 질문이 많았고, 대부분은 쉽게 해소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고3 때 담임선생님이 드물게 그 고민을 경청해주는 분이었다. 당장 뭔가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고민을 해본 것과 해보지 않은 것은 다를 것이라는 미지근한 지지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었을 질문을 내치지 않은 그분의 태도가, 뭔가를 따져 묻고 지킬 힘을 조금은 길러줬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사랑에 관해 거의 골몰하지 않는다. 질문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만족할 대답을 찾아서다. ‘어쩌면, 사랑’이 사랑보다 사랑 언저리의 이야기를 다룬 것처럼, 내 20대 역시 연애로서의 사랑 바깥에서 감정과 관계를 이해해나가는 시간이었다. 통상 단 한 사람과의 연애 관계에서만 얻어질 듯이 말해지던 것들이 그렇지만은 않음을 알게 됐다. 우리가 타인의 삶과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훨씬 더 폭넓고 다채로워질 수 있었다.

의혹과 억하심정이 사라지니 연애 관계도 다른 관계들만큼은 특별하다고 인정해줄 여유 또한 생겼다. 어쩌면 이제야말로 로맨스라는 장르에 대해 이야기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만화 속 로맨스 대부분은 결국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자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사건이 아니라 관계와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에 집중하곤 한다. 바로 그 덕분에 자칫 떠돌거나 버려질 고민과 감정이 아주 소중하고 새삼스러운 것으로 다뤄진다. 마치 연애 자체를 하기보다 질문을 해소하기가 중요했던 우영과 나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절실한 고민을 경청하는 로맨스만의 섬세함과 다정함이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필요하다고 믿는다.

연애로서의 로맨스에 국한되지 않는 로맨스

이렇다 할 연애 장면 하나 없이 ‘사랑’을 말하며 로맨스 카테고리에 자리 잡은 ‘어쩌면, 사랑’처럼, 사랑이나 로맨스에 관한 내 관점과 문장도 어딘가 조금 어긋나고 어색한 모습일지 모른다. 하지만 연애로서의 로맨스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때야 발견되는 것이 있다. 영영 풀리지 않을 듯한 가족 문제나, 일상을 함께했던 존재를 애도하는 감정, 차마 포장하지 않고는 내보일 수 없던 여성들의 음습한 욕망 또한 로맨스에서 포착되는 것들이다. 로맨스를 읽으며 만난, 지극히 개인적이되 결코 사사롭지만은 않은 발견들을 이 지면을 통해 나누고 싶다. 그 많던 질문과 번민을 쩌렁쩌렁 펼쳐 보일 수 있다니, 몹시 반갑고 신난다.

최윤주 만화평론가

 

*현실 연애엔 무관심하면서도 로맨스 만화는 가세가 기울 만큼 읽어왔다. 그 경력을 살려 다양한 관점에서 로맨스 만화를 읽어보려 한다. 6주마다 연재.

카카오웹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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