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너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보여주는 실수 만회법

상호 괴롭힘 과잉의 소셜미디어가 주는 위축감… 자책하는 기억 대신 응원하는 관계로
등록 2025-11-20 22:09 수정 2025-11-27 21:08
‘너는 귀여운 여자아이’ 7권의 한 장면. 대원씨아이 제공

‘너는 귀여운 여자아이’ 7권의 한 장면. 대원씨아이 제공


소셜미디어 엑스(X)가 언쟁의 장이 되는 것은 일상이며 그중 유의미한 논의도 많다는 것을 알지만, 점점 더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 고의적 악의가 담긴 행동이나 명백한 혐오 발언만이 아니라 맥락이 잘린 농담이나 너무 오래전의 발언까지 곧잘 시시비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 발화자가 여성 연예인이나 평범한 개인일 땐 불링(괴롭힘)에 가까운 수준으로 달궈지는 비판이 어쩔 수 없이 우려된다. 나 역시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 같은 건 억지 평화를 위한 말이라 믿고, 당장 최근에도 한 정당의 대변인이 장애인 비하 발언으로 분통을 터뜨리게 해 더욱 조심스럽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은 특정 시기가 아니라 어느 때라도 필요한 논의이기에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본다.

‘뼈다귀 동맹’의 결성

이렇게 과열되는 분위기를 경계하는 이유는 그런 태도가 알게 모르게 체화돼서다. 단편적으로 편집된 ‘썰’이나 기사 요약본을 볼 때마다 무심코 엄격해지는 스스로를 보며 놀라곤 한다. 전후를 둘러싼 사정을 헤아리기보다 섣불리 잘잘못을 따지며 상대의 상식이나 인성에 의문을 던진다. 그런 습관은 부메랑처럼 내게로 돌아와서 오프라인에서의 말 한마디조차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본디 말이란 휘발되는 성질의 것임에도 어디 녹취라도 당하는 것처럼 움츠러들곤 했다.

필요 이상으로 과도해진 조심스러움을 조금씩 내려놓기로 마음먹은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러나 기약도 적정선도 없이 서로를 몰아붙이는 모습이 그다지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실언을 두고 매일 커져만 가는 두려움에 압도돼 기진맥진해질 때쯤 생각을 바꿨다. 멸균 상태를 지향하며 허용되는 말과 행위를 지워가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고. 타인을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애쓰는 와중에도 잘못은 일어날 수 있는데, 그때 다음을 기약하는 너그러움이 점점 더 절실해지는 시대라는 생각을 했다.

일본의 순정 만화 ‘너는 귀여운 여자아이’(이치노헤 루미 지음, 대원씨아이 펴냄)의 등장인물 키요도를 소개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다. 키요도는 ‘서브남주’(보조 역할의 남성 등장인물)다. 삼각관계에서 사랑에 실패하는 쪽인 서브들은 독자인 내게 곧잘 아픈 손가락이 되는데, 키요도는 아주 드물게 잘 차여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친구다. 그가 차이는 과정이 실수로 망가뜨렸던 시절을 만회해가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키요도의 첫 등장은 주인공 코에다의 괴로운 기억에서 펼쳐진다. 145㎝의 깡마른 몸 때문에 ‘뼈다귀’ ‘젓가락’이라 불리며 자라온 코에다는 “나 같은 게”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고, 귀여운 머리핀 하나 꽂는 일조차 주제넘다고 여길 만큼 자신을 불신한다. 자신을 좋아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며,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조차 징그럽다고 믿는 고등학생으로 자랐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큰 상처를 남긴 사람이 키요도였다.

두 사람은 중학생 시절 짝꿍으로 만났다. 뼈다귀 같다며 경멸당하는 게 일상이었고, 그로 인해 자기를 혐오하게 된 것 또한 닮은 점이었다. 공통의 경험은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게 했다. 상대의 상처를 정확히 헤아리는 동시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존재가 되어, 어느덧 서로는 각별한 사이가 된다. ‘뼈다귀 동맹’의 결성이었다.

진심으로 사과하려는 ‘무릅씀’
키요도가 코에다와 사귀지 그러냐는 동급생의 놀림에 “됐어, 그런 젓가락”이라고 대답하고 하필 코에다가 그 말을 들으면서 ‘뼈다귀 동맹’은 해산됐다. 대원씨아이 제공

키요도가 코에다와 사귀지 그러냐는 동급생의 놀림에 “됐어, 그런 젓가락”이라고 대답하고 하필 코에다가 그 말을 들으면서 ‘뼈다귀 동맹’은 해산됐다. 대원씨아이 제공


 

그런데 키요도가 코에다를 배신하고 만다. 코에다와 사귀지 그러냐는 동급생의 놀림에 “됐어, 그런 젓가락”이라고 대답해버렸고, 하필 코에다가 그 말을 듣는다. 한두 번 들어온 말이 아니지만 마음을 나눴던 키요도에게 듣는 것은 코에다에게 너무나 큰 상처가 됐다. 결국 코에다는 뼈다귀 동맹의 해산을 외치며 키요도와 멀어지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여기까지만 읽는다면, 실수의 파괴력에 주눅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히 작품은 키요도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록 아주 긴 분량을 할애해 기회를 준다.

키요도는 수년 만에 우연히 재회한 코에다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쓴다. 거듭 찾아가고, 연락하고, 제멋대로라 싶을 만큼 고집스럽게 대화를 시도한다. 지나쳐 보일 수 있는 그 무릅씀을 통해, 오랜 상처에 머물러 있던 코에다와 자책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키요도 두 사람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키요도는 코에다가 입은 상처에 진심으로 사과하는 한편, 그때 그런 말을 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은 코에다를 좋아했지만 뼈다귀 같은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징그러워 인정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실수에 이유를 덧대는 것이 변명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오래도록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못했던 치부를 털어놓았다는 점에서 그의 고백은 해명이자 사죄로 들린다. 코에다는 키요도의 상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에, 자신과 너무도 똑같은 약점을 지닌 그를 다시금 마주하고 서툰 사과를 받아들인다.

키요도의 일을 가해가 아닌 ‘실수’라고 말하고 싶은 이유는 그 역시 코에다처럼 자기 자신다울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키요도가 경멸과 조롱에 파묻혀 자신을 내보이는 일에 서투른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코에다를 향해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실수를 사과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는 사실이 읽는 이의 마음을 너그럽게 한다.

키요도의 사랑은 실패했다. 하지만 키요도가 실패의 도화선이 된 오래전의 실수를 만회하려 노력한 덕분에 두 사람은 홀가분하게 각자의 시간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 물론 거기엔 그런 키요도의 노력을 외면하지 않은 코에다의 너그러움도 작용했다. 내버려뒀다면 ‘잘못’으로 끝났을 실수를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애쓴 여정을 따라가면, 이야기의 끝에서 조금은 더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게 된다. 이를테면 앞으로의 그들은 타인과 자신의 실수에 좀더 너그러워질 거라고, 불안과 자책이 아닌 안심과 기대 속에 지낼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이야기의 후반, 전처럼 매일같이 티격태격하는 사이로 남지는 못해도 ‘뼈다귀 동맹'으로서 평생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겠다고 약속하는 모습은 그런 낙관적 미래의 첫 장면으로 비친다.

서로의 실수를 용납하는 사회라면

때로 어떤 실수는 영구적 손상을 일으킬 것처럼 치명적이거나 스스로를 오랫동안 용서할 수 없게 해서 우리를 괴롭힌다. 그런 순간에, 드물더라도 강렬한 만회의 경험이 있다면 그 경험이 주는 신뢰에 기대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실수가 우릴 결정짓지 않으며, 타인으로 인해 상처받더라도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것. 타인의 실수를 용납해주는 일이 반드시 나를 다치게 하진 않는다는 것. 만회의 경험이 주는 그런 신뢰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일이 조금은 덜 두려울 것 같다.

 

최윤주 만화평론가

 

*현실 연애엔 무관심하면서도 로맨스 만화는 가세가 기울 만큼 읽어왔다. 그 경력을 살려 다양한 관점에서 로맨스 만화를 읽어보려 한다. 6주마다 연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