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곳곳에서 ‘보편’에 대한 열망이 터져 나온다. 보편은 때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망쳐버린 자유주의 국제질서로, 때론 극우 정당의 약진에 흔들리는 민주주의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전자가 비정한 신자유주의로, 후자가 ‘가진 자들’의 공허한 말잔치로 여겨지기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런 전환은 퍽 의미심장하다. 보편은 어느새 타도의 대상에서 지고의 가치가 됐다.
모두가 보편을 갈망하는 시대, 전후 일본 지성사를 다룬 김항의 ‘어떤 패배의 기록’(창비, 2025)은 보편의 한계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많은 서평은 책의 요지를 “전후 일본이 보편주의를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전전(戰前)의 식민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로 요약했다. 여기서조차 보편은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엿보이지만, 사실 책의 내용은 정반대다. 일본은 보편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식민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김항이 하려던 이야기에 가깝다. 보편은 필연적으로 적과 아군, 문명과 야만을 가르며 내전을 일으키고 위생의 이름으로 타자를 지워버린다. 이 책을 ‘제국일본의 사상’(창비, 2015)이 아닌 ‘내전과 위생’(연두, 2024)과 겹쳐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일본의 ‘평화헌법’은 전후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극우 세력의 지상 목표인 재무장화에 맞설 마지막 방파제로 여겨진다. 하지만 지은이에 따르면 평화헌법과 재무장화는 사실 같은 전제 위에 서 있다. 아베 신조 정권이 밀어붙인 새로운 안보법제는 국제 협력의 기치 아래 “적극적 평화주의”를 추구할 것을 천명한다. 견강부회 아니냐며 힐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화헌법 역시 ‘인류의 적’을 상정한 가운데 성립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자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평화헌법의 결연함을, 북한이나 이슬람 테러조직을 만인의 적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안보법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본 전후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맞수였던 마르크스주의도 보편의 역설을 넘어서지 못했다. 전후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이 마주한 곤경은 혁명이 ‘이미’ 완수됐다는 사실이었다. 혁명과 함께 사라져야 할 노동계급과 국가가 여전히 버젓이 존재하는, 그러나 이들을 주체로 호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탈린주의는 보편을 수단에 종속시켰다. 젊은 혁명가 이토 리쓰는 “혁명을 팔아넘긴 자”라는 누명을 쓰고 이역만리 중국 베이징에서 27년 동안 사상개조를 당했다. 반면 일본과 소련, 미국의 삼중 스파이였던 노사카 산조는 죽기 직전까지 일본공산당의 원로로 대접받았다. 정치는 음모와 테러가 난무하는 스펙터클로, 마징가제트(Z)와 첩보물의 이미지로 소비됐다.
이렇듯 전후 일본에서 전후 민주주의든, 마르크스주의든 보편의 이름을 빌린 투쟁은 모두 패배했다. 보편에 의존하지 않고 존엄과 해방을 상상할 수는 없을까. 김항은 전후 민주주의의 ‘천황’이라 불렸지만 누구보다 날카롭게 그 한계를 비판했던 마루야마 마사오로부터 지혜를 빌려온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로부터 주어진 보편이 아닌, ‘자연상태’에서 얻게 된 일상의 습관으로 이해했다.
마루야마가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앞두고 모든 가정에 권총을 한 자루씩 배급하자는 ‘엉뚱한’ 주장을 했던 것도 그래서다. 민주주의란 어떠한 폭력에도 결연히 맞서 지키고자 하는 ‘자연권’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여겼다. 보편 없는 민주주의의 가능성, 솔깃하지만 선뜻 그려지진 않는다. 좌우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지고의 보편으로 떠받드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도 모르겠다.
유찬근 대학원생

김항, ‘어떤 패배의 기록’, 창비, 20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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