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산 폭발 기원하고 있어.”
연인과 헤어지고부터 은밀한 소망을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매일 그의 미래를 생각했다. 그의 불행이 실현되는 미래. 그 생각이 나를 못살게 굴었다. 울게 만들었다. 그냥 다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 지구의 온도를 바꾸며 자멸하고 있음에도 아무도(까지는 아니지만) 이 문제에 주목하지 않는 사바세계 따위. 식량위기로 전쟁이 나고, 가난한 국가의 사람들부터 굶주리게 되고, 한때 공짜로 여겨졌던 깨끗한 물과 공기를 돈 주고도 살 수 없게 되어 여생을 고통받느니, 백두산 대폭발이나 운석 충돌 같은 빅 이벤트로 한 방에 가는 편이 자비롭지 않은가. “희망은 없다. 그냥 오늘 즐겁자.” 이것만이 지금 내게 살아남은 정신이다.
인구 33만 명이 조금 넘는 경남 진주에서 만난 두 명의 비건 지향 친구가 있다. 거리낌 없이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우리는 종종 모여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 먹는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사실 멸망하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인간이지만) 비건 음식으로 만찬을 즐기겠다고 말하는 작고 소중한 집단이다. 이별한 초식마녀를 위로하고자 금요일 저녁 시간을 내준 친구들을 위해 순대볶음을 만들기로 정했다. 비건과 순대는 너무 멀리 있었으니까, 멸종하기 전에 한 번쯤 조우시켜주기로 한다.
단, 과거에 먹던 재료가 아닌 과거에 먹던 맛으로 만난다. 온라인으로 돼지의 창자가 아닌 식물성 껍질(원재료명에 ‘베지케이싱’이라고 쓰여 있다. 구체적인 재료는 노하우가 담겨 있어 비밀인 듯하다)로 만든 순대를 샀다. 서울비건이라는 곳에서 만든 이 비건 순대는 돼지 내장으로 만든 순대와는 달라서 전자레인지에 데웠을 때 가장 말랑 쫀득하게 익는다. 전자레인지에 익혀 가위로 쑹덩쑹덩 자른다. 얇게 저민 양파를 기름에 볶다가 양념장을 넣는다. 양념장은 간장과 고추장, 고춧가루, 약간의 식초와 설탕을 섞어 만들었다. 순대볶음 맛의 핵심인 들깻가루는 양념과 미리 섞어줘도 되고 마지막에 뿌려도 된다. 자잘하게 자른 깻순과 한입 크기로 손질한 순대를 넣고 불을 끈 다음 양념에 버무린다. 불을 끄는 걸 추천하는 이유는 웍에 오래 볶으면 순대가 해체돼 짧은 당면 볶음이 돼버리기 때문에….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은 오랜만에 느낀 순대볶음이 맛있었는지 빨리 레시피를 내놓으라고 했다. 유튜브로 올리겠다고 약속했지만 한 달째 올리지 못했다. 이별하고 혼자가 됐지만 혼자가 된 티를 내기 싫었다. 유튜브며 인스타그램이며 여기저기 올라와 있는 연애의 흔적들. 첫 책을 쓰고 이혼했던 것처럼 우리 이야기를 쓴 책이 나오면 또 이별하는 게 아닌가 두려웠으면서도 공개적으로 연애하는 티를 내는 이유가 있었다. 사생활이 드러나는 여성 1명 가구에는 그편이 더 안전하니까. 순대 없는 순대볶음처럼 애인 없이 연애하는 척을 했다. 영영 밝히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나는 좀처럼 숨길 줄을 모른다. 그와 영영 멀어지며 한 시간마다 잠에서 깨는 한 달을 보냈다.
글·그림 초식마녀 비건 유튜버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남을 살리는 밥상으로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4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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