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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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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세상에 혐오를 뭉치는 대신 사랑을 택하다

좀비 바이러스 창궐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폭력 이야기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
등록 2024-06-28 08:23 수정 2024-07-03 07:32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 작품 이미지. 카카오웹툰 갈무리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 작품 이미지. 카카오웹툰 갈무리


아주 어렸을 때는 남의 일기장이 궁금했다. 내가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가 훔쳐보려 하면 후다닥 덮어버리고 내게 이마를 찌푸리는 언니의 일기장이 궁금했다. 낙서를 위해 아무렇게나 집은 공책을 일기장이라며 낚아채가는 엄마를 볼 때마다 그것들엔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지 호기심이 마구마구 커졌다. 그런데 조금 크고 나자 더는 다른 사람의 일기장이 궁금해지지 않았다. 타인의 사생활을 존중해서이기도 하지만, 내게 보여주지 않는 것을 굳이 들춰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아서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 몰래 엄마의 일기장을 펼쳤을 때 사실은 나를 증오했었다는 내용의 일기가 몇 년을, 꼬박꼬박 이어진다면 나는 아마 다시 일어날 수도 없이 넘어져버릴 거다. 흐물흐물 녹아내리거나.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는 인육에 강한 식욕을 느끼는 좀비가 창궐하는 세계관에서 주인공 천재 닭과 심연, 정복자 할머니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다. 주인공 심연은 어머니의 일기장에서 자신에 대한 해묵고 촘촘하고 강렬한 증오를 발견한다. 어긋나고 비틀린 가족의 진실을 알아버린 심연이 좀비들을 피해 시골로 피난을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좀비와 남성들의 폭력 등 여러 위협 앞에서도 그는 특유의 발랄함과 자신감으로 자신을 지켜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특유의 가는 선으로 된 작화 때문일까, 만화를 읽다보면 그는 툭 치면 곧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다. 심연은 왜 가장 가는 선으로 된 부분부터 부서져 거친 붓선 몇 개로 분해돼버릴 것만 같을까? 부러질 것 같은 가냘픔으로, 심연은 피난 와서 만난 자그마한 정복자 할머니와 고등학교 동창, 시골 마을의 경찰 송강에게 또다시 애정을 준다.

생을 마감한 뒤 귀신이 되어 심연을 찾아온 어머니 김미연씨는 심연에게 빛나는 재능과 아름다운 사랑으로 반짝이던 자신의 젊었을 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거장 시인인 남편의 폭력과 불륜을 묵인하고 딸에 대한 혐오를 일기장에 가둬놓는, 빛바래고 우울한 눈을 가진 중년 여성이 됐다. 죽기 전 정신과 진료를 받은 김씨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산산조각이 난 그 모든 것들을 들여다보면 어쩐지 그 반짝임이 한없이 무상하면서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대로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요. 조각들을 하나하나 소중히 모아서 그 애 하나에 눈송이로 뭉쳐놓으면 다른 이들은 더 이상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어떤 행복했던 추억도 더럽히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우리는 모두 약간씩은 세상에 의해 절망하고 다들 아주 조금씩은 폐허의 냄새가 나잖아요.”

우리는 김씨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탓해야 할 대상이 명확한데도 산산조각이 난 파편, 이미 무너져 훼손된 기억에 대한 감정을 애꿎은 딸 하나에게 뭉쳐 쌓아놓는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잔인함을 발견하고 절망한 심연, 역시 폐허를 간직한 심연은 김씨처럼 한 사람에게 혐오를 뭉쳐놓는 대신 불가항력적인 사랑을 선택했다. 그 사랑에는 ‘그럼에도’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럼에도 심연은 타인에게 조심스러운 애정을 준다. 김씨와는 다른 선택을 한 심연처럼, ‘세상에 의해 절망’하고서도 다시 일어서서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을 침착히 바라보는 힘이 우리에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신채윤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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