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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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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유치원, 재개발단지 출신들 동창회가 열렸습니다

버려진 식물들에 ‘새 주인 찾아주’는 ‘식물유치원’ 프로젝트, 졸업식 4번 뒤 동창회… 도심 한가운데 사람 없는 곳에서 왕성하게 자라는 식물들
등록 2023-12-01 20:00 수정 2023-12-07 22:24
2023년 10월1일 서울 흑석동 재개발구역을 ‘재개발산책모임’ 모임원들이 산책하고 있다. 사람이 떠난 곳에서 식물들은 햇볕과 비와 바람을 맞으며 더욱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백수혜 제공

2023년 10월1일 서울 흑석동 재개발구역을 ‘재개발산책모임’ 모임원들이 산책하고 있다. 사람이 떠난 곳에서 식물들은 햇볕과 비와 바람을 맞으며 더욱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백수혜 제공

2023년 11월25일 저녁 8시. 서울 지하철 1호선 신길역 부근 지하도를 나와 재활용품이 늘어선 재활용센터와 중장비 사이를 지나자 철제 셔터가 굳게 닫힌 2층 건물이 나왔다. 건물 옆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오르면 보이는 문을 열자 연둣빛 어린잎을 매단 레몬나무 모종, 바싹 마른 진갈색 씨방에 둘러싸인 별정향풀 씨앗 등을 앞에 두고 6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11월20~26일 일주일간 열렸던 ‘공덕동 식물유치원 동창회’(이하 동창회)의 수다 모임 날이다.

여러 쌍의 눈이 더 많은 걸 마주치는 ‘함께 산책’

‘공덕동 식물유치원’(인스타그램 @GongduckP)은 백수혜(36)씨가 서울 재개발단지에서 원주민이 버리고 간 식물을 구조해서 돌보다가 새 주인을 찾아주는 프로젝트 이름이다. 2021년 6월 서울 공덕동 주변 재개발 단지를 산책하다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3년째 계속되고 있다.

백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많은 활동을 나누고 함께한다. 식물을 함께 구조하고, 구조한 식물을 공덕동 집 마당에서 돌보며, 서로 돌보는 방법을 묻고, 잘 크거나 잘 크지 못하는 식물의 안부를 나눈다. 잘 자란 식물은 새 동반자를 찾아준다. 2023년 백씨의 유치원에서 잘 자란 식물을 새로운 곳으로 보내는 졸업식을 네 차례 열었다.

동창회는 백씨가 SNS에서 모집한 ‘재개발 식물산책’ 모임이 모태가 됐다. 백씨는 서울 재개발구역을 함께 산책하면서 식물을 만나고 식물 이야기를 하는 모임을 기획했다. 아름다운재단 ‘변화의 물꼬’ 사업에 선정돼 세 번의 식물산책 모임 등을 지원받았다. “재개발구역에 가면 땅만 빼고 모든 것이 버려져 있어요. 사람이 떠난 자리에 식물은 엄청난 생명력을 뽐내며 왕성하게 자라거든요. 재개발, 재건축으로 다 사라지기 전에 여러 쌍의 눈이 함께 보면 더 많은 걸 마주치고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백씨가 ‘함께 산책’을 기획한 이유다.

백수혜씨(오른쪽에서 세번째) 등 '재개발 식물산책' 모임원들이 '식물동창회'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수혜 제공

백수혜씨(오른쪽에서 세번째) 등 '재개발 식물산책' 모임원들이 '식물동창회'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수혜 제공

함께해서 더 많은 것을 만나고 구조할 수 있었다. 2023년 10월1일 두 번째 식물산책 모임에서였다. 서울 흑석동 재개발구역 빈집 시멘트 담장 너머로 녹색 열매를 매단 가지가 무성하게 늘어져 있었다. 무화과나무였다. 원예학을 전공한 한 20대 모임원이 전지가위를 가지고 온 터라 곧 뿌리 뽑힐 무화과나무에서 몇 가지를 데려올 수 있었다. 모임원은 무화과 가지에서 잎을 잘 잘라내어 물에 담근 뒤 뿌리 내리는 물꽂이 방법을 소상히 알려줬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열매 까마중을 먹어보기도 했다. 어릴 적 까마중을 따서 먹어본 경험이 있는 모임원이 “먹어도 되는 열매”라고 일러줬다.

서울숲 도시정원사로 활동하는 민선희(50)씨는 이날 재개발 식물산책 모임에서 이끼류인 ‘꼬리고사리’를 구조했다. 이끼가 뿌리 내린 벽 부근을 도구로 긁어내면 이끼가 뿌리와 함께 떨어진다. 민씨는 2022년 서울숲 정원에 이끼를 심었다가 ‘초록별’로 떠나보낸 뒤, 이끼에 더욱 관심 갖게 됐다. (반려식물과 함께 사는 ‘식집사’들은 식물이 죽는 것을 ‘초록별로 간다’고 한다.) “서울숲을 제주처럼 꾸미고 싶은 마음에 이끼에 대해 잘 모른 채 식재했다가 장마철 비에 떠내려 보내고, 뜨거운 도시의 볕에 말라 죽게 했어요. 미안한 마음에 이끼를 공부하니 습기를 머금었다 건조할 때 내뿜는 등 이끼의 특성을 새롭게 알아가고 있어요.” 이날 민씨가 이끼를 구조하는 모습에 ‘없애야 할 균류’로 이끼를 오해하던 몇몇 모임원도 이끼를 다시 보게 됐단다.

흑석동 재개발구역 빈 집 담장 너머로 가지를 늘어뜨린 무화과나무. 공사가 시작되면 버려질 무화과나무 가지 일부를 잘라내 물꽂이로 뿌리를 내렸다. 백수혜 제공

흑석동 재개발구역 빈 집 담장 너머로 가지를 늘어뜨린 무화과나무. 공사가 시작되면 버려질 무화과나무 가지 일부를 잘라내 물꽂이로 뿌리를 내렸다. 백수혜 제공

“너도 한번 키워봐” 소매넣기를 아시나요

이들은 왜 재개발 식물산책 모임에 참석했을까. 대학원생 민예빈(24)씨는 식물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고 싶어서다. “식물을 키우다보니 그 생명력에 매번 놀라요. 제가 며칠 잊고 물을 안 줬는데도 새순이 날 때마다 신비롭고요. 버려진 식물에도 관심 갖고 함께하게 됐어요.”

대전에서 예술활동을 하는 배제형(38)씨는 ‘소매넣기’에 당했다. 소매넣기도 식집사들의 용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소매치기하듯, 자신이 기르던 식물을 “너도 한번 키워봐” 하고 ‘슥’ 나눠주는 식집사들의 문화를 소매넣기라고 한다. 백수혜씨가 친구 배제형씨에게 스킨답서스를 슬쩍 밀어넣었다. “한번 키워봐.” 식물을 처음 길러본 배씨는 식물을 돌보면서 자신도 돌보게 됐단다. 재개발 식물산책도 그렇게 왔다. “너도 한번 와봐.”

민선희씨는 지금 재건축 예정 지역에 살아 재개발 식물산책 모임에 더욱 관심이 갔다. 그가 사는 마당 있는 단독주택은 이제 곧 공사가 시작되면 철거되고 아파트로 바뀐다. 집 마당에는 길고양이 세 마리가 터를 잡고 ‘마당냥이’가 됐다. 마당에는 금낭화, 나도사프란, 민들레, 배초향, 수세미, 아기나팔꽃, 토란, 포인세티아 등 직접 심은 식물 수십 종과 어디선가 씨앗이 날아와 자라는 식물이 어우러져 있다. ‘식물과 고양이까지 조화롭게 이주 가능한 방법이 있을까’가 요즘 하는 가장 큰 고민이다.

배제형씨가 재개발단지 산책 뒤 페트병을 활용해 만든 구름 화분. 류우종 기자

배제형씨가 재개발단지 산책 뒤 페트병을 활용해 만든 구름 화분. 류우종 기자

재개발 식물산책 모임의 마지막이 동창회다. 모임원들이 산책하며 떠올린 것을 사진, 글, 그림으로 만들어 전시하는 일상 전시회로 꾸렸다. 배제형씨는 재개발 단지를 걷다가 버젓한데도 곧 철거될 다세대주택 옆 울창한 나무, 푸른 하늘, 하얀 구름을 찍었다. 배씨가 평소 집에서 쓰는 페트병 화분에 코바늘로 뜨개질해서 만든 흰색 화분 커버를 씌워 ‘구름 화분’을 만들어 사진 앞에 걸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자연이 더 아름답게 존재할 수 있음을 도심 한가운데서 발견했어요.”

백수혜씨는 출입금지 경고장이 붙은 재개발구역 빈집 대문,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은 각종 쓰레기, 화단 등을 그대로 사진에 담았다. “사람이 떠난 자리가 적막하고 쓰레기가 가득해 처음에는 무서워요. 그런데 한 걸음 더 들어가보면 거기 사는 고양이와 새가 보이고, 폭풍 성장하는 식물이 보여요.” 백씨는 오래된 것을 허물고 새것을 지을 현장에서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본다. 종종 짜임새 좋은 등나무 의자, 작은 탁자 등을 구해내 물건의 사용주기를 늘리고, 사람들이 버린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식물의 생명도 건져낸다.

2023년 11월22일 서울 영등포구 ‘공덕동 식물유치원 동창회’ 전시장에서 만난 백수혜씨. 류우종 기자

2023년 11월22일 서울 영등포구 ‘공덕동 식물유치원 동창회’ 전시장에서 만난 백수혜씨. 류우종 기자

쓰레기가 가득한 집, 한 걸음 들어가보면

영국에서 미술을 전공한 화가이자 전시기획자인 백씨는 식물유치원을 하면서 일상예술 실험도 한다. 기린초, 알로카시아, 채송화 등 구조한 식물을 쉽게 설명하는 식물카드를 다양한 버전으로 만들고 있다. 동창회처럼 일상 공간 속 전시도 기획한다. 동창회를 연 장소는 그가 평소 식물산책 모임을 하고 작업하는 곳이다. “갤러리에서 하는 유명 전시도 좋지만 친구가 그린 그림, 친구가 찍은 사진, 친구가 뜨개질한 작품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일상 예술을 하는 백수혜씨는 식물유치원을 하면서 주변에 있지만 알아채지 못하는 ‘일상 식물’의 향기를 사람이 더 많이 알아채길 바란다. 라벤더, 로즈메리 못지않게 ‘케이(K)-허브’인 방아와 개똥쑥의 향기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겨울방학을 맞은 백씨의 식물유치원이 내년에는 또 어떤 식물을 만나고 초록 이야기를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박수진 자유기고가 surisurij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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