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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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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을 말할 때 말하지 않은 것들

글은 어떤 것을 취사선택하는 과정… 응축하는 힘이 주제를 살린다
등록 2022-12-29 17:36 수정 2023-05-11 13:45
단골 김밥집의 칼과 김밥. 김진해 제공

단골 김밥집의 칼과 김밥. 김진해 제공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빠짐없이 말할 거야’라고 각오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 언제나 부정확하다고 불평합니다. 그는 ‘김밥’이란 말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김밥’은 ‘김’과 ‘밥’이 합쳐진 말인데, 눈앞에 보이는 그 음식은 다른 재료들도 가득 담겨 있거든요. 그걸 사람들이 깡그리 무시한다는 거였죠. 그래서 그는 김밥집에 가면 이렇게 주문합니다. ‘노란무당근소시지시금치어묵깻잎김밥 한 줄 주세요!’ 떡볶이집에 가서도 ‘고추장어묵대파떡볶이’ 1인분을 달라고 합니다. ‘고추장어묵대파계란떡볶이’와 ‘고추장어묵튀김만두떡볶이’ ‘고추장어묵대파라면사리떡볶이’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한심스러웠습니다.

엉뚱해 보이겠지만 그의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다!’ 말은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담을 수 없습니다. 김밥에 들어가는 노란무, 당근, 소시지, 시금치, 어묵, 깻잎을 모두 나열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우리가 아는 김밥을 온전히 말한 게 아닙니다. 나열된 재료를 양푼에 담아 뒤섞는다면 그건 김밥이 아니라 비빔밥이겠죠. 김밥은 대나무 김발 위에 김을 놓고 밥을 얇게 편 뒤 나무젓가락 굵기 정도로 다른 재료들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돌돌 말아야 합니다. 그 위에 참기름을 살짝 바르고 참깨를 뿌리기도 하죠. 김밥은 재료뿐만 아니라 고유의 모양과 만드는 절차가 있습니다. ‘김밥’이라 말하면 ‘진짜 김밥’에 대한 정보가 줄줄 새어나갑니다.

두 개의 눈이 필요한 이유

말은 사물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만 선택합니다. 언어학에서는 이것을 ‘활성화’라고 합니다. 말은 대상의 일부분만을 선택적으로 드러내고 선택되지 않은 것들을 감춥니다.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가 많지만 그중 ‘김’과 ‘밥’만을 선택적으로 활성화한 것이죠. 나머지들은? 모두 감춰집니다. 잊히는 거죠.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차가 가로수를 들이받았다’라는 문장을 보시죠. 이런 사고가 일어났다면, 이 문장은 그 사고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고 할 겁니다. 이걸로 끝일까요? ‘자동차가 가로수를 들이받았다’는 문장은 ‘자동차가 빗길에 미끄러졌다’ ‘자동차가 중심을 잃었다’ ‘자동차가 도로의 턱을 타고 올라갔다’ ‘자동차 보닛이 ㅅ자로 구겨졌다’ ‘자동차 에어백이 터졌다’ ‘자동차 운전자가 머리를 다쳤다’ 따위의 문장을 숨깁니다. 다시 말해 ‘자동차가 가로수를 들이받았다’는 문장은 전체 사건의 극히 작은 부분만을 도드라지게 선택한 것이죠.

한 편의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은 연속적이고 뒤엉킨(미분화된) 세계에서 어떤 것은 언급하고 어떤 것은 누락시키는 방식으로 편집합니다. 우리의 기억도 편집입니다. 여러분의 하루를 5분짜리 영상으로 편집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나중에 눈으로 보는 건 5분짜리 그럴듯한 영상입니다. 나머지 23시간55분은 잘려나가는 것입니다. 글도 선택이고 편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개의 눈이 필요합니다. 한쪽은 말이 드러내는 부분을 보는 눈이고 다른 쪽은 말이 감추는 부분을 보는 눈입니다. 이 두 개의 눈을 갖췄다면 세상을 헤매지 않아도 됩니다. 고수(달인)들이 ‘은둔형’인 경우가 많은데 이해가 갑니다. 한눈 안 팔고 자신이 하는 일을 곱씹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것’ 뒷면에 붙어 있는 ‘할 수 없는 것’을 함께 사고하되, ‘할 수 없는 것’에까지 도달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성인은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고 하더군요(<도덕경> 47장). 문을 열고 세상일에 귀를 쫑긋하지 않아도 새로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말해지지 않은 것을 떠올리고 곱씹자

‘색즉시공’(色卽是空)이란 말도 우리 얘기와 이어집니다. 색즉시공은 시간 순서대로 ‘색’(色)이던 것이 ‘공’(空)으로 바뀐다는 뜻이 아닙니다. 색만으로도 안 되고 공만으로도 안 됩니다. ‘색이면서 동시에 공’이라는 것입니다. 색과 공을 동시에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겠죠.

글을 쓸 때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동시에 ‘나는 무엇을 선택하지 않았는가’를 검토해보세요. 무작정 쓰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언제나 선택이다. 감춰진 게 더 없을까?’라고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가시적인 말을 불신할 때 새로운 말이 튀어오릅니다.

말 나온 김에 김밥 얘기 좀더 해보죠. 바쁠 때 자주 가는 김밥집이 있습니다. 부부가 하는 가게인데 손이 얼마나 날랜지 가게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 한 꼭지를 미처 다 보기 전에 김밥을 포장해줍니다. 남편은 전형적인 회사 중역 같은 모습입니다. 약간 무뚝뚝하고요. 갈 때마다 알루미늄포일에 싸달라고 하지만 잠깐 방심하면 거창한 스티로폼에 담고 계십니다. 그렇게 자주 갔는데 무심하기도 하지. 아내분도 몸놀림이 단정해 귀티가 납니다.

그런데 그 김밥집에 대해 글을 쓴다면 그런 얘기는 안 할 겁니다. 제가 그 집에 가는 이유는 ‘칼’ 때문이거든요. 김밥 써는 칼이 심하게 닳아서 애초의 칼날보다 반 정도 크기밖에 안 됩니다. 더 놀라운 건 저 칼이 고작 3년밖에 안 됐다는 사실입니다. 이 집 주인 내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저 칼이 증언해주더군요. 저는 다른 것들은 다 버리고 ‘칼’을 선택할 겁니다.

표현된 것 뒤에 표현되지 않은 것이 동시에 있음을 알고 자신이 선택한 단어와 문장을 겸손하게 보되 불필요하게 택한 건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표현되지 않은 것 속에 놓친 것이 없는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선택한 단어와 문장을 허투루 대할 수 있으며, 어찌 그 단어와 문장에 가려진 것을 애틋하게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말에 가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찾으려고 더듬거리는 마음으로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칫솔’에 깃든 수만 가지의 이야기

처음 16편의 글을 받을 때만 해도, ‘처음이라 이렇겠지!’ 했습니다. 그게 아니더군요. 이번에도 13편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게다가 4편은 연이어 보내주신 글입니다(도희님, 숙연님, 정선님, 혜욱님, 고맙습니다).

처음보다 글이 매끄러워지셨더군요. 어떻게 한순간에 이렇게 좋아질 수 있을까요?(제 조언이 큰 도움이 됐나봅니다. 흐흐) ‘칫솔’을 글감으로 자신들이 겪은 여러 사연을 담담하게 표현하셨더군요.

반으로 갈라져 누운 칫솔모를 보며 학력 경쟁에 짓눌려 불안해하는 중학생 딸아이(미경님), 신병 시절 흡연 금지 규율을 어겼다가 칫솔로 샤워장을 청소했던 추억(도희님), 다 치웠다 생각했는데 화장실에 놓인 칫솔을 보면서 알게 된 옛사랑의 의미(목희님), 남편의 기나긴 치과 치료를 보며 중학교에 가서야 칫솔을 가질 만큼 가난했던 남편의 삶(영미님), 물컵 하나에 칫솔 하나씩 담긴 모습을 보며 독립해 나갈 자식들과의 헤어짐에 대한 걱정(숙연님), 여행 가서 내 칫솔을 같이 쓰겠다는 동네 언니의 말을 거절 못해서 고생했던 기억(혜욱님), 절친 둘 중 한 명을 좋아했는데 그 둘이 서로 좋아한다는 걸 알게 돼 자신이 이에 낀 이물질 같다는 자각(진영님), 부드러운 칫솔모처럼 자신을 응원하고 돌봐주는 사람이 많다는 깨달음(희섭님), 양치질의 중요함을 설득하시는 치과의사에게서 얻은 물건에 대한 애정(송아님),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칫솔(윤정님), 치과 치료를 받으며 느끼는 늙음의 비애(기환님), 홍수 피해로 가재도구 청소할 때 요긴했던 칫솔의 재발견(정선님), 칫솔로 자신의 쓸모를 자각함(현지님).

모든 것이 담긴 ‘한 문장’을 뽑아내야

많은 분이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을 찾으려 애쓰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조언을 드리자면, ‘응축’을 시도해보기 바랍니다. 구체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려면 어느 한 문장에 글의 핵심이 집약돼야 합니다. 계단을 밟고 올라서듯이 칫솔에 얽힌 사건을 풀어내다가 어느 대목에 가서는 추상화 작업을 해야 합니다. 화살이 과녁을 향하듯이 구체적 사건 속에서 알게 된 깨달음을 하나의 문장에 담아야 합니다. 그 문장은 얘기가 흩어지지 않고 주제를 향하도록 잡아당기는 역할을 합니다(각각의 문장이 비슷한 장력과 밀도로 서로를 끌어당기는 글도 있지만,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보내주신 글 중에서 추상화를 시도한 글을 볼까요.

이별 여행이 돼버린 강원도에서 돌아와 너의 흔적들을 조금씩 정리했다. 그렇게 네 물건들을 다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칫솔을 치우는 것은 깜박했나보다. 칫솔은 그런 거였다. 책상 위에 있는 머리끈 같은, 부엌에 있는 젓가락 같은. 너무나 당연한 물건이라 잊기 쉬운 것이었다. 양치라는 지독한 일상성이 주는 그 아련함에, 끝끝내 너의 칫솔만은 한동안 버리지 못하였다. 그렇게 너의 존재는 시나브로 스며들어 마침내 내 삶을 장악했었나보다.(목희님)

옛사랑의 칫솔을 버리지 못하면서 느끼는 회한이 잘 묻어납니다만, 조금 욕심이 나더군요. ‘양치라는 지독한 일상성이 주는 그 아련함’이란 표현을 다듬었으면 싶어요. ‘아련하다’는 말은 또렷하지 않고 희미하다는 뜻이거든요. 마지막에 ‘너의 존재가 스며들어 내 삶을 장악했었나보다’라는 문장도 더 조밀하게 다듬으면 어떨까 싶더군요. ‘버리지 못한 칫솔에서 내 삶에 스며들었던 너를 본다’ 식으로요. 이런 훈수는 대부분 쓸모없고 유해하기조차 합니다만….

김진해 경희대 교수·<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새해맞이 기념으로 글을 보내주십시오. 내 글 속에 무엇이 드러나고 무엇이 감춰졌는지, 감춰진 것에서 다시 드러낼 만한 게 없는지를 점검하면서 써보시길 바랍니다.

주제 오래된 물건

분량 1천 자 정도

마감 2023년 1월18일 수요일

보낼 곳 han21@hani.co.kr

*무적의 글쓰기: 20년 가까이 글쓰기 강의를 해온 김진해 교수가 ‘적도 친구로 만들고 싶은’ 무적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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