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심은 자작나무가 10년 사이 농막 옆 흰색 몸통의 나무가 됐다.

2013년 심은 자작나무가 10년 사이 농막 옆 흰색 몸통의 나무가 됐다.
이 땅에 드나들기 시작한 건 10년 전이다. 서른 중반, 개인적으로 세게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온 사건이 있었다. 지난 시간 내가 한 모든 선택이 후회스럽고 나이는 먹고 모아둔 돈은 없는 현실이 한심스러웠다. 스님들 책을 찾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매일 팔딱팔딱 뛸 것 같던 그즈음,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떠올린 게 진부 밭이었다. 그래, 나 땅 있는 여자였지. 나무를 심자. 어디로 도망 못 가는 확실한 내 것을 만들자. 10년쯤 키워 팔면 돈도 꽤 되겠지.
마침 나무 심기 딱 좋은 4월이었다. 친한 K언니와 검정 마티즈를 타고 진부로 향했다. 진부나들목 뒤편에 있는 농원에서 한 그루에 100원짜리 엄지손가락만 한 오대산 소나무 묘목을 10그루쯤 샀다. 회초리 같은 자작나무도 10그루, 열매로 술 담그는 산사나무, 삶아 먹으면 간에 좋다는 벌나무… 묘목 수십 그루가 하룻밤 술값도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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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기구상에서 삽 한 자루, 호미 두 자루를 샀다. 산채집에서 비빔밥을 먹고, 반찬으로 나온 고추장아찌를 슬쩍 챙기고 가게에 들러 옥수수막걸리 한 통과 커피믹스 두 상자를 샀다. 경차 트렁크가 꽉 찼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밭으로 향했다. 중학생 때 부모님 따라 가본 게 마지막이었던지라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밭은 십수 년째 방치된 땅답게 허리까지 자란 마른풀로 가득했다. 마침 부슬부슬 내린 비에 발이 질퍽질퍽 빠지도록 밭이 질었다. 밭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밭 전체와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엄마한테 듣기론 1240평이었는데 막상 보니 1천 평 정도, 얼마 안 되네 싶었다.
진흙 밭에 짐을 부리고 등산용 스티로폼 방석을 깔고 앉았다. 우선 고추장아찌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하며 한숨 돌리고, 삽을 들었다. 밭 한 귀퉁이에 심기로 하고 먼저 풀을 뽑았다.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머리채 휘어잡듯 두 손으로 붙들고 온 힘을 다해 당겨야 흙덩이를 잔뜩 매달고 겨우 뽑혀나왔다. 갈대인지 억새인지 옥수숫대만큼 굵고 높게 자란 풀포기는 삽이 들어가지도 않아 포기했다. 일을 시작하니 1천 평이 넓긴 넓었다. 1평이나 될까 숨을 헐떡이며 겨우 자리를 마련해 수종별로 한 줄씩 주르륵 심었다. 과연 이 ‘엄지손가락’과 ‘회초리’가 나무가 되긴 될까. 남은 막걸리를 마시고 밭에서 내려왔다. 발은 진흙에 푹 절었고 가랑비에 옷도 축축이 젖었다. 손이 곱아 연장 챙기기도 어려웠다. 비 내리는 4월의 강원도는 아직 겨울이었다.
밭에서 내려와 양쪽에 있는 두 집에 커피믹스를 한 상자씩 드렸다. “요 위 밭에 왔는데요” 하니 “아 거기 풀 때문에 풀씨 날리지, 또 고라니가 얼마나 많다고요. 주인이 누군지 몰라서 연락도 못하고. 전화번호 하나 줘요” 한다. 갑자기 번호를 따이고는 흙투성이로 차에 올라탔다.
아침에 울분에 찬 채로 깨고, 낮엔 모니터를 바라보고 앉아 있어도 속에 천둥번개가 치기를 반년. 나무 몇 그루 심었다고 상처가 쉽게 낫지는 않았다. 시간이 걸릴 만큼 걸려 제정신을 차리는 동안 나무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고 10년. 그때 그 일은 기억도 안 나지만 묘목은 내 키를 훌쩍 넘겨 어엿한 나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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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에서 번호를 따이고 나서 다음해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 S리 이장이래요. 한번 내려와보셔야 될 것 같은데요.” 일회성 이벤트로 끝났을지 모를 진부 밭과의 인연이 그렇게 이어졌다.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박기완 경남 밀양의 농부(예정)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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