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봄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2경부고속도로 공사.
“뱀이다.”
비명과 함께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오금이 저려왔다. 지난봄 벌어진 일이다. 모진 겨울을 건너 따사로운 햇볕이 고마운 날이었다. 밭 한 귀퉁이에서 물을 저장하는 큰 대야를 옮기려 한쪽을 드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새끼 뱀 두 마리가 똬리를 튼 채 ‘뭘 봐?’라는 듯 나를 쳐다봤다. 대가리가 세모 형태면 독사라던데…. 무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내 눈에 뱀 대가리가 네모인지 세모인지 들어올 리 없다. 황급히 대야를 도로 내려놓았다.
“이걸 어쩐다. 저놈들을 때려잡아야 하나? 분명히 엄마나 아빠 뱀이 있을 텐데, 걔네가 원한을 품고 나한테 복수하면 어쩌지? 그렇다고 뱀이 사는 밭에서 농사지을 순 없는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세상에서 뱀이 제일 무섭다. 사자와 싸워도 잘하면 내가 이길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가끔 하는데, 뱀 특히 독사와의 싸움은 자신 없다. 특히나 친환경 농사 한다며 비닐을 쓰지 않아 풀이 허벅지까지 자란 이 밭에서 뱀은 치명적인 생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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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이 밭을 빌려 농사를 시작한 뒤 뱀을 본 건 이날이 처음이다. 그동안엔 뱀과 마주치지 않은 덕에 마음 푹 놓고 낡은 운동화만 신고 고랑을 걸어다녔더랬다. 이젠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평상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뱀 출몰 사건’ 수사를 시작했다. 5년간 볼 수 없던 뱀이 어디서 온 것일까. 누가 일부러 풀어놨을 리는 없다. 설령 풀어놨더라도 여기가 제집인 줄 알고 가만히 살 리도 없다. 밭에서 두더지가 판 듯 보이는 굴이나 개구리를 종종 봤지만, 뱀이 좋아하는 먹이가 이 밭에서 갑자기 늘어날 까닭도 없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평상에서 일어서는 내 눈에 건너편 민둥산이 보였다. 지난해까진 나무가 빽빽하던 산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나무가 모조리 뽑혀나갔다. 세종포천고속도로, 이른바 제2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이다. 심지어 고속도로를 떠받치는 교각이 내 밭에서 20m가량 옆을 지나간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나의 엘도라도가 곧 자동차 매연과 먼지, 진동, 소음에 시달릴 것이다. 이곳에서의 농사를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뱀의 원래 거주지가 저 산일지 모른다. 굴착기와 덤프트럭에 밀려 이 밭으로 강제 이주당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85년 전 고려인들이 옛 소련의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쫓겨났듯 말이다. 뱀들한테는 이 나라가 스탈린일 수도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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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을 밭에서 쫓아내는 건 윤리적이지 않을뿐더러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공존하기로 했다. 그 뒤 웬만하면 밭에서 장화를 신는다. “제발 물지만 말아달라”고 빌며….
전종휘 <한겨레> 사회정책부 기자 symbio@hani.co.kr
*전종휘 기자의 ‘농사꾼들’ 연재를 마칩니다.
*농사꾼들: 주말농장을 크게 작게 하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전종휘 <한겨레> 기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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