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연의 토마토, 호박, 땅콩 씨앗.
봄이면 어김없이 곳곳에서 씨앗 나눔 행사가 열린다. 지금처럼 많은 농민과 교류하지 않던 10년 전에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에 후원하고 씨앗을 받거나 김혜영 농민이 농부시장 마르쉐에서 여는 ‘토종이자란다’를 찾아가 행사도 돕고 씨앗도 얻었다. 안타깝게도 토종이자란다는 두 해 전 마르쉐 활동을 중단했다. 그래도 그 경험과 배움은 씨앗처럼 번져 여기저기서 자신만의 나눔 활동을 펼친다.
그렇게 경기도 양평에서 농사짓는 호연도 춘분(3월20일)을 맞아 아내 혜원과 함께 양평에서 운영하는 식료품점에서 자신만의 씨앗 잇기 행사를 열었다. 호연과 같은 작목반에서 농사지었던 파람, 같은 양평에 살며 교류하는 종합재미농장의 신범과 정화가 자리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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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은 토마토만 스무 종도 넘게 농사짓고 씨앗을 받을 정도로 토마토에 푹 빠져 있었다. 너무 많은 종류의 토마토가 서로 교잡되면 그림을 그려 토마토를 기억했다. 어떤 토마토에는 우아하고 우람하다는 의미로 ‘우아람’, 어떤 씨앗은 색의 번진 모습을 본떠 ‘그을린’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 많은 토마토 그림을 보고 토마토 품종 하나당 적어도 5분씩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호연의 모습이 퍽 재미있었다.
호연의 ‘교잡 시리즈’는 비단 토마토만은 아니었다. 교잡이 잘되는 호박도 어떤 모습인지 그림을 그려 소개했고, 처음에는 흰 땅콩과 검은 땅콩을 심었는데 종류가 7개로 불어나 다양한 색을 띠는 땅콩 이야기도 너무 재미있었다. 호연의 씨앗 나눔은 주인장 특유의 자유로운 기질과 개성이 돋보이는 자리였다. 호연도 언젠가는 유명한 정원사들처럼 자신의 이름을 붙인 품종을 개발하게 될까?
종합재미농장은 토종 팥과 콩을 교잡 안 된 좋은 씨앗만을 선별하는 정선 작업을 엄격하게 거친 뒤 완벽하게 소분 포장까지 해서 내놓았다. 모두가 신범의 꼼꼼함에 감탄했는데, 평소 ‘일회용품 어떻게든 재사용하기’의 달인인 신범은 외식할 때 수저가 든 포장지를 버리지 않고 씨앗 봉투로 재사용했다는 후일담을 들려줬다.
올해 농사를 쉬어가기로 했다는 파람은 종자 몇 가지와 다시 농사를 시작할 때 씨앗을 돌려받겠다며 장부를 꺼내 들었다. 파람의 씨앗은 호연보다 다국적이었다! 어디선가 먹고 너무 맛있어서 한 알 남겨 말린 골든베리(땅꽈리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크고 맛이 미묘하게 다르다)와 타이거너츠(그냥 풀처럼 생겼는데 덩이뿌리에서 정말 고소한 아몬드 같은 맛이 난다!), 종묘 회사의 오이 씨앗을 받아 다시 심었더니 계속 같은 오이가 나와 3대째 키우고 있다는 꼬마노각오이까지. 사람들은 장부에 이름을 적는 파람의 모습에 폭소하면서도 파람의 씨앗에는 쉽게 손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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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받고 파는 씨앗은 아니지만 서로 자신이 이은 씨앗을 키워보라고 어필하며 내 종자가 어떻게 맛있는지, 어떤 즐거움을 주는지 원 없이 이야기했다. 정화는 강원도의 할머니들이 채종 시기를 놓쳐 서리를 맞든가 해서 발아력이 떨어진 씨앗을 두고 “씨앗이 눈감는다”고 표현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표현이 슬프면서 참 아름답게 들렸다. 이날, 씨앗들도 우리 이야기를 들으려 눈을 뜨지 않았을까.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