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5월23일에 일어난 그 비극적 사건은 두 개의 상이한 이름으로 불렸다. ‘송하살인사건’이 그 하나다. 일본 경찰이 붙인 명칭이었다.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송하마을에서 허어금(19)과 허주화(16) 두 자매가 친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라는 뜻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는 한술 더 떴다. 어머니를 때려서 사망에 이르게 한 ‘살모사건’이라거나 ‘친모살해사건’이라고 불렀다. 독자들의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기대하는 명칭이었다. 그 속에는 악의가 숨어 있었다. 사회주의자란 이념을 위해서라면 친어머니마저 해치는 끔찍한 존재라는 낙인 말이다.
성진농민조합 동료들은 ‘송하스파이사건’이라고 불렀다. 송하마을에서 벌어진 일본 스파이의 자살 사건이라는 말이었다. 성진농민조합 제1차 탄압 사건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아들을 빼내기 위해, 다른 동료들의 소재지 정보를 경찰에게 은밀히 알려준 어머니가 자신의 소행이 밝혀지자 그만 자살하고 만 사건이라는 뜻이었다. 이 용어에는 두 딸이 한사코 소명하려 했던 바람이 담겨 있었다. 딸들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일관되게 살해 혐의를 부인했다. “어머니가 밤중에 우물에 투신한 것 같습니다”라고 진술했고, “피고들이 죽은 시체를 그 우물에 넣은 것이 아닌가?”라는 잔인한 추궁에 “그런 일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답변했다.1
아들 허철봉(許鐵峰·27)은 어떤 입장이었을까? 그가 고향을 등질 때 “여러 동무에게 얼굴을 들고 대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채, 어디론가 행방 모르게 마을을 떠나갔다고 한다.2 어머니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긴 것 같다. 집 떠난 지 2년 뒤 작성한 글에서 그는 당시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출옥한 후에는 그전 동무들이 나에 대한 태도가 좋지 않으므로, 알아본즉 나의 어머니가 일본 경찰의 정탐이라고 하므로, 나는 조사하여본 결과 나의 어머니의 태도가 수상한 것과, 나의 자체가 쉬이 놓이지 못할 신분임에 불구하고 놓인 것과, 나의 처가 나의 어머니가 밀탐이라는 말하여주는 고로, 나는 집에서 떠나갔습니다.” 3
허철봉의 생생한 육성이다. 그는 어머니의 행위를 조사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일본 경찰의 밀정 노릇을 했다는 말이 떠돌았고, 그토록 친밀하던 농민조합 동료들이 자신을 경원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성진경찰서 유치장에서 출감한 뒤 나타난 현상이었다.
조사 결과 허철봉은 어머니가 밀정을 했음을 확신했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그는 어머니의 태도가 수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언행에 조리가 없고 뭔가를 감추는 태도가 역력했다. 둘째, 자신의 출감이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함께 체포된 다른 구금자들은 그대로 유치장에 갇혔는데 자기 혼자만 예외로 석방됐던 것이다. 성진농민조합의 중견 간부였는데도 그랬다. ‘쉬이 놓이지 못할 신분’ 아닌가. 그는 19살 되던 1925년부터 송하청년회 간부가 됐고 이후 성진청년동맹과 신간회 성진지회, 성진농민조합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23살에는 성진 신간회 집행위원 후보에 오를 만큼 비중 있는 인물로 성장했다. 셋째, 어머니와 같이 기거해온 젊은 아내가 고백했다. 어머니가 밀정이 틀림없노라고.
허철봉은 자괴감에 어쩔 줄 몰랐다. 자신이 석방된 것은 어머니의 밀정 행위에 대한 보상임이 틀림없었다. 자기 아들만을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의 일탈 행위였다. 수감된 아들을 석방시킬 목적으로 아들의 동지들을 경찰에 팔아넘겼다.
그는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어리석은 행위를 되돌릴 수도 없었고, 동지들의 시선을 받아내기도 부끄러웠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예전처럼 지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고향을 떠난 허철봉의 행방은 어떠했는가? 한설야의 작품으로 소설 <설봉산>이 있다. ‘송하스파이사건’을 모티브로 한, 평양에서 간행된 1956년도 작품이다. 고향을 떠난 주인공의 행방에 관해서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소설 마지막에 주인공이 결심하는 구절이 나온다. “‘김장군 부대로!’ 경덕(허철봉)은 오직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흥분과 긴장 속에 마침내 한 밤을 꼬박이 지새워버렸다”라고.4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과 연계를 맺는다는 설정이다. 저 유명한 1930년대 함경도 농민운동 중에서도 가장 선진적이던 성진농민조합이었다. “일개 군의 대부분 지역을 혁명화한, 사회주의운동 사상 처음 보는 적색사건” 5이라는 평가를 받는 성진농민조합이 그 연계 속에서 전개됐다는 인식이었다. 이 견해는 1950년대 중반 북한의 정치 상황을 반영하는 진부한 클리셰라 할 수 있을지언정, 1930년대 전반기 혁명운동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았다.
현실은 어떤가. 허철봉의 술회에 따르면, 그는 집을 떠나 약 2년 동안 각종 노동에 종사했다. 동선을 따라가보자. 함경북도 길주 철도 부설 현장에서 1개월 노동, 서울 경성전기회사 분전소 건설현장에서 1개월 노동, 3개월간 실직, 다른 건축공사장에서 15일 노동, 생업을 위해 과일장사·수공업 등 온갖 일에 종사, 종로1정목 ‘태양자전거’ 점포에서 6개월간 점원, 경성부청 용산출장소 건축 공사장에서 15일 노동, 한 달간 실업 상태, 용산제면회사 건축 공사장에서 10여 일 노동 등을 했다.
주로 서울에서 지냈음을 알겠다. 상대적이나마 일자리를 얻기 수월하고 노동자 생활을 하기에도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일을 했지만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각종 건설현장의 노동자 생활이었다. 적어도 5곳 이상의 공사 현장을 돌아다녔다. 안정된 생활은 자전거 점포에서 6개월간 점원 노릇을 한 것이 고작이었다. 자주 실직 상태에 빠진 점도 눈에 띈다. 생활이 불안정했고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허철봉의 진술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사회주의운동과의 조직적 연계도 일정하게 유지했던 것 같다. 모스크바 유학을 권유받은 것을 보면 말이다. 그는 1933년 12월16일 서울을 떠나 모스크바 가는 길에 올랐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을 위해서였다. 허철봉을 ‘모스크바로 보낸 동무’는 ‘쓰또린’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실제 이름은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적임자를 선발해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을 추천하고 모스크바로 파견할 만큼 권한이 있는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필경 코민테른이나 태평양노동조합 등의 국제기구와 연계한 이른바 ‘국제선’ 계열 사회주의자였을 것이다.
허철봉은 무사히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여비는 어떻게 마련했는지 자세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스크바 시내 북쪽 트베르스카야 불리바르 거리 13번지에 위치한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부에도 예정대로 찾아갈 수 있었다. 1934년 2월 초 어느 날이었다.
그러나 허철봉의 공산대학 입학은 허용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아직 알 수 없다. 대신 러시아에 체류할 여건을 받는 것은 합의된 듯하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인사부장이 1934년 3월10일에 작성한 취업 추천서류가 남아 있다.
“내화재료공장 관리자 앞.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김마오(Ким-Мао) 동무를 귀 공장 중의 한 곳에서 노동자로 일할 수 있도록 요청합니다. 김마오 동무의 취직에 관련된 모든 문제는 우리 직원 가르도쉬 동무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6
김마오(Ким-Мао)란 허철봉이 모스크바에서 사용한 가명이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학생들은 졸업 뒤 조선으로 파견돼 비밀 혁명활동에 종사할 예정이었으므로, 누구나 가명을 써야 했다. 입학을 타진하는 단계부터 그랬다. 혁명가의 신원을 보호하려는 조치였다. 대체로 러시아식 이름을 쓰는데 허철봉은 그러지 않았다. 다만 ‘마오’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이유로 그 글자를 택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허철봉이 취업을 알선받은 직장은 보로네시에 있는 제9내화재료공장이었다. 보로네시는 모스크바 남쪽 520㎞ 떨어진 곳에 있는 남부 러시아의 주요 도시였다. 도시의 서쪽 외곽에 있는 노동자 지구 ‘세밀루키’에는 1929년 내화재료공장이 들어선 뒤 인구가 증가했다. 1939년 현재 인구는 7300명이었다. 이 공장은 내화벽돌, 내화유리 등의 건축자재와 가정용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러시아 굴지의 대규모 공장이었다.7 허철봉은 이곳에서 3년7개월 동안 일했다. 담당 업무는 철공이었다.
이제 마지막 얘기를 전할 때가 왔다. 허철봉은 러시아에 망명한 여느 조선인 혁명가들이 겪었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비에트 국가 폭력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구 스베틀라나 여사가 편집한 자료집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한인 희생자들> 제13권 30쪽에는 김마오에 관한 짤막한 정보가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1937년 11월14일이었다. 보로네시주 세밀루키 소재 내화재료공장에서 철공으로 근무하던 허철봉은 내무인민위원부 비밀경찰에게 체포됐다. 이 정보는 “그의 향후 운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 끝맺는다.8 허철봉의 최후는 어떻게 됐을까? 무사히 풀려났을까, 아니면 다른 혁명가들처럼 일본 밀정이라는 치욕스러운 누명을 쓰고서 생을 마감해야 했을까. 어두운 예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구타 사실만은 시인, 살모자매 공판경과’, <동아일보> 1932년 11월16일
2. ‘사상과 인륜의 대참극, 實母 타살한 자매 공판’, <동아일보> 1932년 10월9일
3. 許鐵峰, ‘(제목 없음) 나는 1906년…’, 1934년 2월10일, 3-4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331, л.6-8об/ㅡ
4. 한설야, <설봉산>, 평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8년(재판), 427쪽
5. ‘성진적색농조사건 終豫’, <조선일보> 1933년 12월3일
6. Завед.отделом кадров(인사부장), Управляющему трестом ‘ОГНЕУПОР’(내화재료공장 관리자 앞), 1934년 3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331, л.4
7. https://ru.wikipedia.org, <Семилуки> 2022년 10월11일
8.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인명편1),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46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74쪽, 2019년 12월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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