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콜라옙스크 해방을 이끌어낸 적색 유격대 사령관 트랴피친.
니콜라옙스크는 아무르강 하구에 있는 항구 도시다. 제정 러시아의 극동 진출 기지로서 처음 건설됐다. 이 도시의 명칭은 당시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러시아 남부 볼가 강변에 있는 같은 이름의 도시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라는 기다란 명칭으로도 불렸다. 아무르 강변의 니콜라옙스크라는 뜻이다.
이 도시는 교통 요지였다. 아무르강을 통해 상류 3천㎞ 지점까지 배를 띄울 수 있고, 바닷길로는 오호츠크해로 연결되는 교통 물류 체계의 거점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다. 러시아제국 극동함대 사령부가 1872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기 전까지 이 도시가 사령부 소재지였다. 행정 중심지이기도 했다. 1914년부터 1922년까지 아무르강 하류 지역과 사할린섬 북부 지역을 합해 ‘사할린주’라는 명칭의 광역 행정구역이 설정됐는데, 그 청사 소재지가 바로 니콜라옙스크시였다.
일본군 조사에 따르면, 1920년 즈음 니콜라옙스크시의 인구는 1만5천 명 남짓이었다.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러시아인이었고 나머지는 동아시아 각 민족이었다. 한인 거주자는 대략 2천 명에 달했다. 시내 거주자로 한정한다면 1411명이었고, 그중 86%에 이르는 다수가 러시아 국적을 가진 이였다. 니콜라옙스크 시내에는 비슷한 규모의 중국인 거주자들과 450명 규모의 일본인 거주자들도 집단을 이뤄 살았다.
한인들은 주로 노동자였다. 오호츠크해로 고기잡이 다녀오는 어업 노동자거나 아무르강 하류에 널리 분포한 사금광에서 일하는 광산 노동자였다. 가족을 이뤄 거주하는 이는 100여 가구에 머물렀고, 그 외에는 대다수가 독신 남성이었다. 한인들은 니콜라옙스크를 가리켜 구어로 ‘미깔래’라고 불렀다. 러시아어 발음 ‘니깔라앱슥’과 유사한 음가를 반영한 한국식 호명이었다. 문자로 표현할 때는 ‘니항’(尼港)이라 했다. 첫음절의 발음을 한자로 음차한 호칭이었다.

1914~1922년 사할린주의 영역과 주 청사 소재지 니콜라옙스크시의 위치.
한인 사회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한국식 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1912년 ‘보흥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비롯한 초등 교육과정을 가르쳤다. 이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한인들은 기부금을 모았다. 여성 40여 명이 재봉 노동으로 번 돈을 모아 95원을 기부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됐다.
한인의 단체 활동도 활발했다. 특히 1912년 10월1일 반일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의 니콜라옙스크 지회가 결성된 점이 두드러진다. 설립 뒤 1년 만에 회원이 1200명으로 늘었고, 1년 예산액이 5610원에 달했다. 같은 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소재한 권업회 본회 회원이 1500명이고 예산액이 3216원이었음과 견줘보라. 회원 수는 블라디보스토크의 80%에 달하고, 예산 규모는 170%다. 니콜라옙스크 한인의 단체 활동 동력이 러시아 한인 사회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알 만하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니콜라옙스크 한인들도 반일 시위운동을 도모했다. 그들은 대표자 5명을 선발해 사할린 주지사 폰 분게에게 청원을 넣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러했듯이 여기서도 한국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합법적인 시위운동을 벌일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는 청원이었다. 러시아-일본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주지사는 그 청원을 기각했지만, 이 청원은 니콜라옙스크 한인들의 집단적 심리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20년 1월, 한겨울이었다. 니콜라옙스크는 위기에 빠졌다. 적대적인 두 무장집단 사이에서 충돌 위험성이 점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 외곽에는 트랴피친 사령관이 이끄는 적색 유격대 3천 명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트랴피친 사령관은 23살의 젊은이로, 전투와 지휘 능력이 뛰어난 군인이었다. 19살 되던 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인 제정 러시아 육군에 입대한 그는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최상위 부사관인 준위 계급까지 승진했다. 현역에서 제대한 뒤에도 그의 군사 경력은 중단되지 않았다. 러시아 내전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볼가강 중류의 사마라 지역에서 처음으로 적위군에 가담한 이후 그의 군사적 재능은 러시아 극동 지방에서 꽃을 피웠다. 수찬, 이만, 하바롭스크, 니콜라옙스크 일대에서 속속 유격대를 조직했다.
니콜라옙스크를 해방할 목적으로 하바롭스크를 떠난 게 1919년 11월10일이었다. 출발 당시 그가 지휘하는 병력은 고작 35명이었다. 니콜라옙스크로 향하는 행군 도중에 백위파 무장 부대와 여러 차례 교전했다. 말미시, 키셀룝카, 수하놉카, 침메르마놉카, 칼리놉카, 마린스크 전투를 거치면서 그의 부대 규모는 점점 늘어났다. 반란을 일으켜 적위군 편으로 넘어오는 병사들 덕분이었다. 마린스크촌에 이르렀을 때 트랴피친의 유격대 규모는 14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행군을 시작한 지 불과 두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트랴피친은 니콜라옙스크 해방을 목전에 둘 수 있었다.
니콜라옙스크시에는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다. 1918년 9월 이래 혁명의 물결을 저지할 목적으로 일본 정부가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군은 니콜라옙스크 항만은 물론이고 해안 포대가 구축된 츠니라흐 요새도 점령했다. 트랴피친 유격대가 도시를 포위했을 때 시내에는 일본 육군 제14사단 소속 병력 350명이 이시카와 세이가 소령의 지휘 아래 배치돼 있었다. 그에 더하여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백위군 병력 300명도 주둔해 있었다. 하지만 다 합해야 적위군 수에 견줘 터무니없이 열세였다. 450명쯤 되는 일본인 민간인도 가세했다. 일본 영사관의 지휘 아래 성인 남성들이 민병대를 조직했다.
니콜라옙스크 일본군은 고립돼 있었다. 아무르강 하류 지역은 북위 53도에 위치한, 춥고 긴 겨울로 이름난 곳이었다. 아무르강은 1년 가운데 5개월은 통항이 가능했지만, 남은 7개월은 결빙으로 선박 항해가 불가능했다. 바다도 마찬가지였다. 결빙된 바다는 5월쯤에야 풀릴 터였다. 그 전에는 육로나 해로, 어느 쪽으로도 외부에서 증원군이 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1920년 1월21일 전투가 시작됐다. 여러 곳에서 소규모 조우전이 있었다. 2월10일에는 전황에 큰 변화가 있었다. 츠니라흐 요새가 적위군에게 함락됐다. 적위군은 이제 포병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 요새에서 확보한 대포로 시내에 있는 일본군 진지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타협을 모색했다. 2월25일부터 28일까지 쌍방 사이에 협상이 진행됐다. 결국 적위군과 일본군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다. 쌍방 사이에 적대행위를 금한다, 일본군은 러시아인의 적백 내전에 엄정중립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적위군이 니콜라옙스크시에 입성했다. 트랴피친 사령관을 비롯한 적위군 참모부는 시내에 자리를 잡았고, 예하 5개 연대 병력은 적절한 곳에 분산 배치됐다. 지방 정권 기관으로서 ‘사할린주 혁명위원회’가 들어서서 행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니콜라옙스크를 중심으로 하는 사할린주가 적위군의 손으로 해방되기에 이르렀다.
적색 유격대는 사할린주 해방의 주력이었다. 그 대열에는, 러시아인이 다수지만 동아시아 각 민족 출신 병사들도 섞여 있었다. 한인, 중국인, 몽골인, 원주민 길레케인 병사들이 있었다. 그중 다수는 한인 병사였다. 이들은 아무르강 하류의 여러 촌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다섯 개의 유격대 부대 구성원이었다. 박일리야 부대, 유조심 부대, 김낙현 부대, 홍의표 부대, 안기석 부대 등이었다. 많게는 100명, 적게는 수십 명인 소부대였다. 이들은 트랴피친 사령관의 리더십 아래 지휘체계를 통합하는 데 동의했다. 이 한인 부대를 지칭하는 명칭은 ‘사할린한인의용대’였다.
이 가운데 박일리야의 지도적 역량이 가장 두드러졌다. 당년 29살 청년으로서 두만강 너머 포시에트군 출신의 교민 2세였다. 그는 니콜라옙스크 한인학교 교사를 지낸 지식층이었다.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트랴피친 사령부와의 교분이 두터웠으므로 한인 부대의 실질적 사령관 구실을 하기에 이르렀다.
불안정한 협정이었다. 상호 불신과 적대감이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휴전 상태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12일 만에 협정은 깨졌다. 파국은 일본군의 야간 기습 공격에서 시작됐다.
1920년 3월12일 새벽 2시 일본군은 트랴피친 사령부를 급습했다. 또한 시내 여러 곳에 분산 주둔한 적위군 부대도 피습 대상이 됐다. 이 공격에는 일본군뿐만이 아니라 일본인 민간인 남성도 대부분 참가했다. 부족한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려니, 동원 가능한 모든 역량을 이 기습 작전에 쏟아넣었다. 기습 공격은 효과적이었다. 트랴피친 사령관은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근 500명에 이르는 유격대 병사가 전사했다. 시내 곳곳이 화염에 휩싸였다. 사령부 지휘 성원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나우모프 참모장이 전사했고, 참모부 비서 포크롭스키체르니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살을 택했다.
전투 첫날에는 일본군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그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근교에 배치된 적위군 연대 병력이 시내에 진입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에 이르렀다. 수적으로 우세한 적위군이 차츰 승세를 잡았다. 전투는 4일간 계속됐다. 3월15일 시내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석조 건물인 ‘시마다(島田) 상점’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시카와 소령이 이끄는 일본군 잔여 병력은 이 건물을 거점 삼아 농성에 들어갔다. 긴 시간의 대치 끝에 마침내 화공 작전이 펼쳐졌다. 온 건물에 등유를 들이부은 상태에서 불을 질렀다. 불길을 피해 탈출하는 일본군은 사살됐다. 중상을 입은 이시카와 소령도 결국 죽음을 면치 못했다.
기습 공격에 가담했던 일본인 민간인들도 보복 대상이 됐다.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일본인 거리는 파괴와 방화, 살육의 현장이 됐다. 여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인 여성 약 80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인이나 러시아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 12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3월15일 정오, 저항하던 일본군 잔여 집단이 항복을 결심했다. 포로가 된 일본군은 117명이었다. 그들을 제외한 일본인 군인과 민간인들이 모두 피살됐다. 3월12일부터 15일까지 계속된, 니콜라옙스크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러시아 적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는 참혹한 결과를 남겼다. 러시아 적군 쪽 사망자가 약 500명, 일본 쪽 군인과 민간인 사망자가 700여 명 나왔다.

일본 해군 군령부에서 작성한 ‘니항 사건의 진상’ 첫 쪽.
이 참혹한 사건을 ‘니콜라옙스크 사건’ 혹은 ‘니항 사건’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3월12~15일 전투는 ‘니항 사건’의 첫 번째 막에 지나지 않았다.(다음호에 계속)
참고
陸海軍省, ‘尼港事件ノ顚末’, 大正 9 年 (*1920) 6 月 23 日 , 405 쪽 . アジア 歷史資料 センター , http:// jacar go.jp
‘보흥학교 흥왕’ , ‘ 권업신문’ 8 호 , 1912년 6월23일, 3 면 .
‘포고’ , ‘ 권업신문’ 97 호 , 1914년 2월8일, 3 면 .
해군군령부 , ‘海諜露報 제 226 호 , 니콜라엡스크 電報 (4 월 3 일발 )’ 1919년 4월8일, ‘不逞團關係雜件 - 朝鮮人 의 部 -在西比利亞 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DB.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윤영호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통일교 자금 수천만원 전달” [단독] 윤영호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통일교 자금 수천만원 전달”](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5/53_17649329847862_20251205502464.jpg)
[단독] 윤영호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통일교 자금 수천만원 전달”

조진웅 ‘소년범 출신’ 의혹 제기…소속사 “사실 확인 중”

김건희, 마스크 거꾸로 쓰고 ‘휘청’…결심공판 출석

전국 법원장들 “내란재판부 법안 위헌성 커…심각한 우려”

전국 법원장들 “12·3 계엄은 위헌…신속한 재판 위해 모든 지원”

우라늄 농축 ‘5대 5 동업’ 하자는 트럼프, 왜?

쿠팡 손배소 하루새 14명→3천명…“1인당 30만원” 간다

김상욱 “장동혁, 계엄 날 본회의장서 ‘미안하다, 면목 없다’ 해”

김혜경 여사, ‘우리들의 블루스’ 정은혜 작가 전시 관람

박나래, 상해 등 혐의로 입건돼…매니저에 갑질 의혹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resize/test/child/2025/1205/53_17648924633017_17648924515568_2025120450403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