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란 말은 꽤 복잡미묘하다. 보통 국민은 너무 딱딱하고, 개인은 너무 가벼울 때 궁여지책으로 쓰이지만 의미는 그때그때 다르다. ‘평범한’이 앞에 붙으면 흔히 ‘소시민’으로 불리는,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뭔가 억울한 상황에 놓인 생활인이 연상된다. 반면 ‘깨어 있는’이 붙으면 세상을 향해 열심히 목소리를 내는 참여자를 뜻한다. 개인의 권리, 특히 재산권과 관련해 쓰이기도 하고 법에는 없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의무를 요구할 때도 시민은 왕왕 동원된다. 같은 시민이라도 상황에 따라, 맥락에 따라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살펴야 하는 이유다.
이처럼 시민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최근 한국역사연구회(이하 한역연)가 펴낸 <시민의 한국사>는 이 점을 고려해도 다소 뜬금없다는 인상을 준다. 2015년 국정교과서 파동을 거치며 탄생한 이 책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추천사처럼 ‘사실’ 중심 서술을 강조한다. 같은 사건을 계기로 탄생한 젊은 역사가들의 모임인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가 이름처럼 다양한 역사해석을 지향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국가에 의한 역사서술의 일원화보다는 극단적 역사서술을 배격하는 데 중점을 둔 모양새다.
문제는 얼핏 봐선 ‘사실’과 ‘시민’ 사이의 관련성을 쉽게 유추해낼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을 중요히 여겼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시민을 위한 역사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역사학계에서 ‘사실’은 이미 퍽 낡은, 유행이 지나간 가치로 여겨진다. 사실만으로 역사를 구성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상식에 속한다. 그렇다면 <시민의 한국사>는 기실 시민과는 별 상관이 없는데다 사실이라는 한물간 가치에 집착한, 시대착오적인 역사서일까? 그렇지 않다. 이 책은 너무나도 ‘시민적’일 뿐 아니라 ‘현재적’이기까지 한,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책이다.
일반적으로 ‘시민’을 앞에 붙이고 나온 책이나 강좌는 교양인이라면 으레 알아야 할 지식을 다룬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 <시민의 한국사>의 ‘시민성’은 내용이 아닌 과정에 있다. 50명 이상의 박사급 연구자가 필진으로 참여하고 20명이 넘는 교열위원이 내용과 표현을 다듬은 이 책은 객관성과 일관성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새로운 연구성과를 어디까지 반영할 것인지는 물론 연구자 개인의 판단과 해석, 심지어 문체까지 논의와 수정의 대상이 됐다. 각 장의 집필자가 누구인지조차 쓰여 있지 않다는 건 그만큼 ‘사견’을 배제하고, 한역연이라는 ‘집단’으로 이 책을 썼다는 방증이다.
치열하게 토론하고, 끊임없이 고쳐가며 끝내 하나의 ‘사실’을 만들어간 역사가들의 여정은 새로운 시민상(像)에 대한 영감을 제공한다. 그간 시민다움의 중요한 구성요소 중 하나는 자기 생각을 당당하게 개진하는 주체성과 적극성이었다. 하지만 온갖 주제로 논쟁을 벌이면서도 정작 의견의 일치를 이루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반박시 니 말이 맞음”의 시대엔 조금 다른 시민다움이 요구되지 않을까? ‘주장하는 시민’에서 ‘합의하는 시민’으로. 생각의 자유를 가장한 무책임과 분열보다는 조금 낡고 바보처럼 보일지언정 공통의 토대를 향한 우직한 한 걸음을. 사실이란 가치를 향해 고집스레 논의와 수정을 거듭한 한역연 연구자들이 꿈꾸는 시민은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유찬근 대학원생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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