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좀 먹어봐, 정말 맛있어.” “응 아니야, 아빠나 많이 먹어.”
고기를 소금장에 찍던 아이는 냉정했다. 하지만 난 흔들렸다. 밭에서 난 채소들을 듬성듬성 잘라, 버섯과 함께 볶기만 했을 뿐이다. 간은 소금과 후추만 했고 들기름을 훌훌 둘렀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있는가. 이렇게 쉽고 빠르고 무성의하게 했는데 맛있는 음식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충족할 수 있단 말인가. 브로콜리가 뭉그러지지 않고 씹혔다. 입안에서 가볍게 부서지는 맛이 아삭하다 못해 고소했다. 버섯의 쫄깃함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고, 들기름의 풍미야 워낙에 확실한 것이지만 놀라움은 호박에서 폭발했다. 이 맛이라면 가히 어떤 음식이라도 받쳐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농사지으며 어쩔 수 없이(!) 가장 많이 먹은 것은 고기다. 7년 전 처음 한 이랑을 얻어 텃밭을 시작했을 때, 뇌피셜(?)로 이해했다. 사람이 왜 염소를 키워왔는가. 아무리 먹어치워도 소용없었다. 사람은 워낙 나약한 존재이기에 제 밭에서 나는 푸성귀를 홀로 다 소화할 수 없다. 그래서 마을을 이루고 이웃과 관계를 맺고 사회성을 습득하지 않았을까. 다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여하튼 그 많은 쌈채소를 먹어치우기 위해 밭농사를 지은 이후 오늘은 삼겹살, 내일은 목살, 간간이 소고기를 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내 배 둘레에 쌓인 지방이 버거워서였을까. 아니 고기 냄새도 지겨울 때가 있는 것일까. 처음으로 오로지 채소만 볶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지금까지 스포트라이트는 오직 고기에만 떨어지고 채소란 모름지기 ‘언성 히어로’(Unsung Hero, 칭송되지 않는 영웅)일 뿐이라고 생각했을까. 특히 호박이 그렇다. 지금껏 단 한 끼도 호박이 요리의 주연이 될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백반집에 가면 으레 나오는 호박 반찬에 손도 안 댔다. 호박은 밥 한 숟가락을 책임질 반찬이라고 믿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밑반찬의 강자라고 생각하기엔 미흡한, 다크호스도 못 될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호박 맛이 달라졌다. 달라진 건 호박 맛일까 내 나이일까.
농사 2년차, 여름의 맛으로 처음 호박을 느꼈다. 엄마 따라 처음 서울 남대문시장에 갔던 7살 여름의 맛은 10원인가 50원인가 하던 보리냉차였다.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던 사춘기 여름의 맛은 분식집에서 팔던 싸구려 팥빙수였다. 기자가 되어서는 평양냉면을 여름의 맛으로 쳤다. 김밥 먹으러 천국 다니는 심정으로 시내 각지 평양냉면집을 순례했다. 그리고 본격 농사 2년차, 호박과 ‘덕통사고’가 났다. 채소볶음 한 사발을 들이켜고 선풍기 앞에 앉아 생각했다. 입맛이란 언제, 어떻게 확립되는가.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 길러진 감각일까 아니면 벼락같은 사고로 마주친 음식의 강렬함일까. 호박 맛을 잊지 못하고 일주일 내내 돌아올 호박을 기다렸다. 하지만 주중에 계속 비가 쏟아붓더라니, 그게 왠지 슬프더라니.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가, 장맛비는 호박을 죄 물러 떨어지게 해놓았다. 주말만 농부의 비애랄까.
글·사진 김완 <한겨레> 영상뉴스부 팀장 funnybone@hani.co.kr
*주말농장을 크게 작게 하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한겨레> 김완, 전종휘 기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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