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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와 에테르, 그 뒤 ‘흐름’은?

서구 근대의 지성사 열어젖힌 유체과학, 민태기의 <판타 레이>
등록 2022-07-07 00:12 수정 2022-07-07 10:36
민태기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민태기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양영순의 웹툰 <덴마>는, 아주 간단히 줄여보자면 인생 계획대로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인과율까지 조정해가며 다중우주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초거대 종교집단 태모신교에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맞서는 각양각색의 존재들이 이 방대한 우주 활극의 주인공인데,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염소 뿔을 단 난민 종족 데바림이다. 예지몽으로 미래를 보는 이들은 태모신교의 탄압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우연과 불확실성을 작중 배경인 ‘8우주’에 끌어들이려 한다. 그런 데바림이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있다. “판타 레이”.

같은 제목을 달고 나온 민태기의 책이 아니었다면, 양영순 작가가 만들어낸 말인 줄 알았을 것이다. 판타 레이, ‘모든 것은 흐른다’는 뜻이란다. 지은이는 헤라클레이토스가 했다는 이 말을 실마리 삼아 서구의 근대과학사를 다시 쓴다. 이 혁명과 낭만의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과학자를 사로잡은 질문은 유체(流體)였다. 이전과는 다른 언어로 움직임과 변화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서구 과학혁명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혁명의 시대를 열어젖힌 건,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순환’에 대한 책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발표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그때까지 회전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던 ‘레볼루션’(Revolution)에 문자 그대로 혁명적 변화의 의미를 가져왔다. 훗날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명명한 이 변화 앞에서, 유럽의 지식인들은 당시까지 제5원소로 불리던 유체 에테르(Aether)를 천체의 새로운 설계도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17세기 유럽 최고의 석학 데카르트가 내놓은 답은 보텍스(Vortex·소용돌이)였다. 우주를 가득 채운 에테르가 만들어낸 보텍스의 흐름이 행성들을 회전시킨다는 것이다. 이에 정면으로 맞선 영국의 뉴턴이 주목한 것 역시 ‘흐름’이었다. 보텍스 없이도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고안한 미적분학의 핵심이 유율(流率), 즉 유체 변화량의 엄밀한 측정이었다. 이후 데카르트의 보텍스 이론은 라이프니츠와 오일러에게, 뉴턴 역학은 볼테르와 달랑베르에게 계승되며 대립과 융합을 거듭하지만 결국 핵심은 유체의 흐름이었다.

유체의 영향은 비단 과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데바림이 태모신교의 계획을 분쇄하려 외우주로부터 들여온 미지의 존재처럼, 유체는 과학의 울타리를 넘어 다양한 분야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대표적 학문이 경제다. 애초에 코페르니쿠스가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그레셤의 법칙을 최초로 분석했고, 뉴턴이 조폐국장을 맡아 화폐 부족을 해결했던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설은 줄의 열역학에서, 미제스의 한계 이론은 베르누이의 효용 개념에서, 케인스의 유동성 함정은 뉴턴 역학에서 영향받았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한다.

이처럼 과학은 물론 기술, 철학, 사회, 경제, 심지어 예술에 이르기까지 근대 서구의 지성계를 풍미했던 유체역학은, 그러나 20세기 도래와 함께 급속히 힘을 잃는다. 결정타는 논쟁의 중심이던 에테르를 물리학 세계에서 완전히 퇴출해버린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이었다. 그럼 오늘날 유체역학은 더 이상 쓸모없는 학문으로 전락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지은이가 얼마 전 발사에 성공한 누리호 터보엔진의 개발자란 사실이 말해주듯, 유체역학은 여전히 항공기와 로켓의 기초 이론으로 중요하게 다뤄진다.

아니, 어쩌면 쓸모를 따지는 일 자체가 어리석을지도 모르겠다. 흐름에 대한 이야기이자 흐름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이 책부터가 세상일이 언제나 계획과 쓸모만으로 흘러가진 않음을 너무나 우아하게 보여주니 말이다.

유찬근 대학원생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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