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류우종 기자
*박주영, 돌아선 얼굴들이 마주 볼 수 있도록 [21WRITERS①]에서 이어집니다.
“중요한 건 국민의 입장과 시각이에요. 여론에 영합하는 판단을 한다는 게 아니라 결론을 설명할 때 그 의미를 국민 입장에서 살피지 않으면 불필요한 오해를 사거나 걷잡을 수 없는 비난에 직면하게 돼요. 판결은 개인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대중에 공개돼 규범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공기(公器)이기도 하잖아요.”
물론 사법부 내 이견도 있다. ‘냉철한 이성과 논리로 무장해야 할 판사가 어디 판결에서 수필을 쓰냐’는 냉소도, ‘사회제도 비판은 판사의 역할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그는 타당한 지적이라고 시원하게 말했다. “판사는 형벌권의 한계를 결정짓고 행사할 뿐 그 이상은 우리 역할이 아니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사건으로 더 들어가고 싶은데 참는 판사도 있어요. 반면 저는 사법 적극주의자인 거고요. 저 같은 사람도 있어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논의가 진전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재판은 오직 해당 사건에만 효력을 미친다. 이미 발생한 오직 한 사건, 한 개인뿐이다. 이 지점이 나를 항상 무력하게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코를 끅끅 삼키며 쓰고 또 쓰는 일뿐이었다.’(<법정의 얼굴들>) ‘판결문이라는 건조하고 비정한 서사, 그 장르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사연들, 그 비감한 서정을 풀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어떤 양형 이유>)
판결문에도 담을 수 없는 법정의 이면, 판단하는 자로서의 고뇌와 번민은 책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에 담아냈다. 누군가는 그의 글이 법정 르포르타주와 에세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평가했다.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판사도 고뇌하는 사람이란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법원이 이런 곳인 줄 몰랐어요.’ 독자 반응이 쏟아졌다. 두 권의 책 모두 출간한 지 한 달이 안 되어 중쇄를 찍었다. “판사와 재판과 법원을 너무 모르고 판사에 대한 디폴트 값이 워낙 낮다보니 생긴 착시 내지 반사효과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래서 기쁜 한편 씁쓸하기도 하고요.”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늘 있었다. 고교 때는 문예부 서클 활동에 진심이었다. 대학 진학도 국문과나 문창과, 신방과를 고민하다 가정형편을 고려해 법학과를 택했다. “애초의 꿈이 아닌 엉뚱한 길에서 헤매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쪽은 아예 쳐다보기가 괴로웠어요. 그래도 늘 마음 한편은 그 바닥을 동경하고 기웃거렸죠.” 사법시험에 연거푸 고배를 마시다가 광고회사 지원서를 넣은 봉투를 우체통에 넣으려던 차에, 1차 합격 커트라인을 간신히 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 떨어졌더라면 그가 만든 맥주나 자동차, 카메라 광고 카피를 봤을지 모른다.
변호사로 일하다 법조일원화가 처음 시행된 2005년 법원에 왔다. 법조일원화는 다양한 경력을 가진 법조인을 판사로 임용하는 제도다. 그는 주로 형사재판을 맡았으면서도, 부산가정법원에서 소년부를 담당하고 언론을 상대하는 공보관도 세 차례 했다. “당사자와 호흡을 같이하고(변호사), 국민의 시각에서 법원을 들여다보고(공보관), 후견적 기능으로 가해자를 교화하려 애쓰는 건 (소년부) 정통 사법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직역들이죠. 조직 눈치 보지 않고 출세 욕심도 없으니 하고 싶은 말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몰라요. 이러라고 저 같은 사람을 뽑은 것 아니겠습니까.(웃음)”
출판 기회는 갑자기 찾아왔다. 2018년 법조인들이 주로 보는 전문지에 칼럼 여섯 꼭지를 썼는데 조은혜 편집자가 연락해왔다. <어떤 양형 이유>에 이어 <법정의 얼굴들>까지 편집한 조 편집자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쌓여 있어도 모든 법조인이 그렇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 박 판사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편집자의 지속적인 설득에 못 이긴 척 넘어갔다. 모아둔 글이 많지 않아 새로 글을 써내려갔다. 전혀 다른 성격의 글인 판결과 에세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게 특히 힘들었다.
“글이라는 게 자신을 노출하는 작업인데, 저희는 정반대 지점에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자꾸 자기검열을 하게 되더라고요. 시원스럽게 나가다가도 주춤거리고 또 숨기려 해도 글에는 전인격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 세심하게 각색하려 하고요. 자신조차 미화하는 글을 써놓고 나서는 그 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현실의 저를 발견하고 부끄럽고 뜨끔한 상황, 고민 같은 것이 자꾸 심리적 태클을 걸더라고요.”
무엇보다 현직 판사가 구체적인 재판 얘기로 책을 낸다는 게 부담스럽고 걱정됐다. 편집자와 머리를 맞대고 사건의 구체적인 정보를 삭제하고 변경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의사나 변호사, 검사 등 전문직 에세이를 쓰는 작가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어떤 사람인지 특정 가능하면 곤란하다는 생각에 가능한 한 많이 각색했죠. 그래도 특이한 사건들이어서 어느 정도 한계가 있어요. 지금도 제일 신경 쓰이는 부분이에요. 이렇게 쓰면 안 되나? 그렇다고 아예 쓸 수 없나? 어느 정도 선으로 허용할 수 있다는 기준을 합의해나가야 할 것 같아요.”

① 새로운 사건이 접수되면 재판기일, 당사자 주장 등 ‘메모’를 작성한다. 종결되면 보통 파쇄하는데 소년재판 메모는 차마 버리지 못했다. 사진 박주영 제공
그러고 보면, 그는 (판결문을) 쓰고, 또 (에세이까지) 쓰는 사람이다. 판사 업무의 팔 할은 판결문 쓰기다. 법정에서 법복 입고 당사자를 마주하는 일은 업무의 일부일 뿐이다. 형사단독 재판을 할 때 일주일의 이틀은 법정에서 재판하고, 하루는 재판을 준비하고, 남은 이틀은 판결문을 쓴다. 매주 10~20건 정도 판결문을 작성하다보니,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 야근과 휴일 근무가 잦다. 1건에 10장이라 치면 글자 수로는 대략 5천~6천 자. 일주일에 10건 정도 선고한다고 쳐도 5만~6만 자다. 한 달에 책 한 권씩 쓰는 셈이다. 신경 써서 양형 이유를 작성하는 판결문은 평소보다 10배는 더 시간이 걸린다.
재판은 쉬지 않고 돌아가기 때문에 판결문은 ‘틈틈이’ 쓰고, ‘짬짬이’ 쓴다. 야간형 인간이다보니 야근할 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아 집중도 높은 휴일에 잘 써진다. 그의 책도 주로 사무실에서 업무 외 시간을 활용해 쓰였다. 그러다보니 편집자에게 주로 자정을 넘긴 새벽 한두 시에 원고를 전송했다고 한다. <어떤 양형 이유>는 6개월, <법정의 얼굴들>은 건강 문제로 휴직해 아파트 독서실을 끊어 1년 정도 걸려 썼다.
“좋든 싫든 써야 하고 글로써 밥벌이한다는 점에서 판사도 일종의 전업작가라 할 수 있겠네요. 선고도 일종의 마감이다보니 가능한 한 마감에 쫓기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최대한 틀리지 않으니까요.” 조은혜 편집자는 그가 자신이 만난 작가 중 단 한 번도 마감을 어기지 않은 ‘유일한’ 작가라고 말했다. 이르면 일주일, 늦어도 2~3일 전에 글을 보내왔다고 한다.
특히 그는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네이버 메모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스치는 생각과 책이나 영화에서 본 인상 깊은 글귀 등을 그때그때 적어두는데 7~8년 쌓인 메모가 4천여 개다. 형사법정이라는 것이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라 과거의 순간과 법정의 순간이 조응할 때가 있다.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자살방조 혐의로 법정에 선 청년 사건 판결문의
<어떤 양형 이유>를 출간한 뒤 벌어진 인생의 변화를 바라보며 그는 생각한다. “삶에는 태생적으로 탑재된 내비게이션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 내비게이션에 따라 어떤 직업을 가졌든, 언제가 되었건 글을 썼을 것 같아요.” 훌륭한 사람 중에 글을 못 쓰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좋은 글씨를 남기기 위해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신영복 선생의 말에 그는 동감한다. “저는 느리더라도 좋은 사람이 되는 방식으로 좋은 글을 쓰고 싶어요. 글과 연대하는 삶의 자세라면, 글쓰기는 좀 못하더라도 좀더 나은 사람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② 글 쓰는 환경이나 도구에 큰 영향을 받진 않는다. 다만 필기구나 다름없는 키보드에 관해선 예민하다. 처음에는 청축 키보드를 썼는데 같은 방을 쓰는 판사들의 원성을 듣고 갈축 키보드로 바꿨다. 현재 무접점 키보드에 정착해 5년여 사용 중이다. 글을 오래, 많이 쓰다보니 ‘손맛’이 있어야 지루함이 덜하다. “잘 쳐질 때는 오타도 없고 리듬감 있게 글도 잘 써지는 거 같아요.” 사진=류우종 기자
‘부산 동부지원은 오래된 법원이고. 부산답게 거의 산 중턱에 있습니다.’ 인터뷰에 앞서 박주영 부장판사의 문자를 받았다. 헉헉대며 오르고 올라 법원 사무실에 도착했다. 2월 법원의 사무분담 변경으로 형사단독 재판부를 맡게 된 그는 막 사무실을 옮긴 참이었다. 휑한 사무실 구석에 풀지 않은 상자 더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10년 전인 2011년 8월 그는 부산가정법원 소년부로 발령받았다. 동료 판사는 ‘소년부는 3대가 덕을 쌓아야 가는 곳’이라며 축하했다. 판결문을 작성하지 않아 업무 부담이 적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법정은 그 너스레가 무색했다. 회전문 돌듯 재범해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보며 힘이 쭉 빠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과 글을 붙들었다. 소년범과 그 부모들에게는 좋은 글귀를 한 장씩 복사해 나눠줬다. 매일같이 일기를 쓰고 메모도 꼼꼼히 했다. ‘물건처럼 전전.’ ‘3남매, 시설로 보내자고 하니 그러자는 할머니, 우는 아이.’ ‘내가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은 아버지, 어머니.’
‘너희의 이야기를 증언하겠다’는 마음으로 쓴 그때 끄적임은 책으로 옮겨졌다. 그래도 메모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두 상자를 이사할 때마다 가지고 다닌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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