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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돌아선 얼굴들이 마주 볼 수 있도록 [21WRITERS①]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어떤 양형 이유> 쓴 박주영 작가 인터뷰
등록 2022-03-22 08:00 수정 2022-03-28 09:31
사진=류우종 기자

사진=류우종 기자

법원의 판결은 판결문으로 남는다. 판결문은 재판의 결과와 이유를 적은 공문서이자 줄 간격 250%, 글자 크기 12포인트, 판결서체로 쓰인 한 편의 글이다.

이 글이 발휘하는 힘은 막강하다. 누군가를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전 재산보다도 많은 돈을 내게 한다. 그래서 ‘오독은 최악이다. 상징과 은유는 상상할 수도 없다. 마지막 물기 한 방울까지 짜내고 짜낸 메마른 문장’(<어떤 양형 이유>)으로 채워진다. 작성 방법이 아예 법으로 정해져 있다. 판결문이 어렵고 난해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다. 판결문을 ‘한 번 읽고 쉽게 이해됐다’고 답한 사람이 10명 중 1명에도 못 미친다(6.5%)는 설문조사도 있다.*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 법언이 있지만 자신이 독자로 대우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는 그 말을 오만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는 판사 입장에서도 마음 쓰리거나 억울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서점에서 박주영(54) 부산지법 동부지원 부장판사의 책 <어떤 양형 이유>를 집어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통상과는 다른 판결문을 무심한 듯 겸허하게 소개하는 책 제목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그의 판결문은 보통의 판결문과 달랐다. 때로는 피고인에게 전하는 편지였고 때로는 사회를 향한 분노였다. 왜 다른 글을 쓰게 됐을까. 보수적인 사법부에서 두려움은 없을까. 그 질문을 묵혀두다 2022년 3월2일 부산 해운대구 부산지법 동부지원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3월15일 전화 인터뷰도 더했다.

(*대구지법이 2013년 9월 일반 시민 128명에게 실시한 ‘판결서에 대한 이해 정도’ 설문조사 결과 중 ‘판결문을 읽어본 경험이 있다’고 답변한 62명에게 질문한 결과.)

어떻게든 알리고 기록하기 위해서

형사재판의 판결문에서 양형 이유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판사가 그나마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판결의 결론(주문)과 이유, 즉 범죄사실→ 증거의 요지→ 법의 적용→ 소송관계인 주장까지 유·무죄에 관한 주요한 법적 판단을 마무리한 다음, 마지막으로 죄질이나 피해 변제 여부, 재범 위험성 등을 고려해 이런 형을 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가 이 양형 이유를 다르게 쓰기 시작한 건 처음으로 형사단독을 맡아 “재판장으로서 홀로 재판을 이끌어가고 판결문도 보다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2014~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4년 현대중공업 선박 건조 현장에서 한 달 사이 산업재해가 세 차례나 발생했다. 하청업체 노동자 4명이 연달아 목숨을 잃고 3명이 중상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현대중공업과 그 하청업체 관계자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직권으로 현장검증에 나섰다. “안전모를 쓰고 선박을 벅벅 기어다녔죠. 발을 조금만 헛디뎌도 바로 사고예요. 지뢰밭 같더라고요.” 무죄가 선고된 현직 현대중공업 대표이사를 제외하고 관련자 전원에게 금고형과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현대중공업 법인에는 1500만원의 벌금을 선고했다. 법정 최고형이 1천만원인 산업안전보건법의 한계가 있었다.

“산재 사건이 정말 많았어요. 벚꽃 지듯 산업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우수수 낙화하는데 처벌은 대부분 벌금이어서 정말 끔찍했어요. 이 사건은 어떻게든 널리 보도돼 거대 기업의 작업 현장에서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지, 또 처벌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왜 대표이사는 처벌할 수 없고, 왜 이런 비극이 반복되는지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죠.”

보통 양형 이유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사정과 불리한 사정을 건조한 문장으로 나열하는 데 그친다. 그러나 그는 9쪽에 걸친 양형 이유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인 산재 사망자 수, 그럼에도 실효성 없는 법, 책임을 외면하는 경영진, 그 밑바탕에 자리하는 위험의 외주화를 차례로 짚었다. 산재 현황이나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 등 각주에 등장하는 연구 자료만 적어도 6가지. 그 양형 이유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현실은 서글프기 그지없다.’

대전지법, 울산지법에서도 연이어 형사재판을 맡았다. “물론 모든 판결문을 이렇게 쓰진 않아요. 100건 중 서너 건 정도. 피고인에게 특별히 전할 말이 있거나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 싶을 때 공들여 쓰죠. 재판 기록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파쇄되지만 판결문은 영구 보존되니까 사건 내용과 양형 이유를 상세히 적어서 그 사안을 영원히 기록하려는 의도도 있어요.”

가정폭력 피해자가 저지른 살인, 동반자살로 불리는 부모의 아동 살해 후 자살 시도 사건 등에서 ‘당원’(법원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은 그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가출 청소년 성매매 사건에서는 ‘우주에는 단 하나의 신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인간의 몸이다’라는 격언을 인용해 ‘타인의 몸을 흥정에 붙이고 거래하는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신의 전당을 파괴하는 범죄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니, 결코 사선 안 되는 게 있다’고 꾸짖었다. 아동학대 사건에서는 ‘아동학대 사망 사건을 선고할 때마다 죽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이 이름이 아동학대로 스러져간 마지막 이름이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다시 참담한 심정으로 이름 하나를 더한다’고 좌절했다.

사진=류우종 기자

사진=류우종 기자

판결의 독자로 호명되는 시민

그의 양형 이유는 보통 △피고인과 사건의 구체적 사정 △연구 보고서나 논문 △‘당원’의 생각과 감정으로 구성된다. 일종의 사회적 부검을 한 결과다. “지금 재판의 9할 이상은 엠아르아이(MRI)나 시티(CT)예요. 범죄가 일어난 그 시점, 그 단면만 잘라봅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양형을 위해서는 미시적이거나 단편적인 모습이 아니라 통시적으로 한 인간을 봐야 해요.” 그 글을 읽다보면 법정에 고개 숙인 채 서 있는 피고인의 얼굴이 그려진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와 사회, 그 낙차를 메꾸지 못하는 법 앞에서 고뇌하는 판사의 얼굴도 보인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이들은 찡그린 듯 울고 희미하게 웃는 또 다른 얼굴이 된다. 독자가 된다.

2019년 10월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20대 조현병 환자가 법정에 섰다. 법원은 보호관찰소의 판결 전 조사를 실시해 피고인의 대인관계, 의료기록, 가정환경을 면밀히 살폈다. 따돌림당한 학창 시절, 치료를 거부하는 피고인을 어머니가 홀로 돌본 이유, 어머니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환상에 빠져 범행에 이르게 된 사정이 드러났다. 법무부의 논문, 국회입법조사처의 보고서, 책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를 인용해가며 이 사건의 사회적 의미를 설명해주던 ‘당원’이 사건 바깥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를 호명했다.

‘이런 끔찍한 범행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크게 놀라지만, 정작 놀라운 사실은 범행의 원인과 대책에 대한 기억과 고민은 순식간에 휘발되어버리고, 정신질환자에 대한 공포와 혐오의 감정만 남아 차곡차곡 쌓인다는 사실이다. 정말 공포스러운 것은 정신질환자가 아니라, 우리의 놀라운 망각과 불감, 무관심과 외면이다.’

판결문이 법원 누리집에 게시됐다. 한 울산 시민이 법원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생명을 해치는 범죄는 강한 처벌만이 해답이라 생각했고 중형이 선고되지 않으면 사법부를 비난하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존재하고 그런 사건에 대한 판사님 생각을 알 수 있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사법시스템의 주체가 인간인 이상 감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실제 재판의 당사자나 국민은 판사가 냉혈한이거나 아니면 대단히 불공정해서 차라리 기계만 못하다고 느껴요. 판사는 밀려오는 사건 앞에서 인간성을 회의하게 되고요. 피해자는 가해자를 인간으로서 동등한 자리에 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죠. 모두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 여기기를 거부하면서 계속 단절돼요. 그렇게 법정은 우리 얼굴을 계속 외면하고 있죠. 하지만 가해자도, 피해자도, 판사도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인식과 믿음이 없다면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단죄하고 나아가 교화하려 노력할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판단하는 사람은 매번 아파하고 슬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반복되는 사건 속에서 기계화돼가는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판결문의 제1의 독자는 물론 재판 당사자와 상급심이다. 그러나 그는 제3의 독자인 국민을 염두에 둔다. 하급심 판결이 전면 공개 대상은 아니지만 언론 보도로 간접 공개되는 현실에서 저자인 판사와 독자인 국민은 때때로 불화한다. 판결문이 불친절하거나, 기자가 잘못 전달하거나, 독자의 이해도가 낮거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비극이다. ‘법담론의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판결문의 사실관계만이라도 쉽게 쓰거나 경어체를 사용하는 시도 모두 긍정적으로 본다.

“법원이 너무 함구해서 때로는 먹지 않아도 될 욕을 먹는다”고 그는 생각한다. 2021년 중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방치해 숨지게 한 20대 청년 사건에서 1심 재판부가 징역 4년을 선고해 논란이 됐다. 한 언론이 그 청년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사연을 소개하면서 법원이 ‘기계적 판결을 내렸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검찰이 유기치사가 아니고 존속살해 혐의로 기소한 이상 최소 3년6개월의 실형이 선고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몇 장 안 되는 판결문으로 이를 설명하기는 부족했다.

*박주영, 전형을 깨고 독자와 마주보는 판사의 글쓰기 [21WRITERS②]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759.html

출간 목록

<어떤 양형 이유>(김영사, 2019)

<법정의 얼굴들>(모로, 2021)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의 첫 책과 두 번째 책 표지 모두 ‘얼굴’이 등장한다. 박주영 부장판사는 첫 책 표지 그림이 “일에 지친 것 같기도 하고, 삶에 지친 것 같기도 하고, 범죄자의 눈 같기도 하고, 판단하는 사람의 눈 같기도 하고, 그래서 법정하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다음 책을 기다리는 독자로서 그의 세 번째 책 표지에도 ‘얼굴’이 등장할지가 소소한 관심 포인트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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