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택은 해방 후에 전평 위원장을 지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전평이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준말로서 해방되던 그해 11월에 설립된 전국적 노동자단체였다. 16개의 산업별 단일노동조합과 1개의 합동노동조합을 아울렀고, 그 내부에 194개의 분회 조직과 21만 명의 조합원을 지닌 힘있는 단체였다. 전체 노동자 수 추정치가 212만 명이던 때였다.1 10%의 조직률을 자랑하고 있다. 허성택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해방 전에 무슨 일을 했기에, 해방공간에서 그와 같이 영향력 있는 단체의 지도자로 나설 수 있었을까?
양복을 갖춰 입은 젊은 남성의 사진이 있다. 이제 막 이발소를 다녀온 듯, 잘 다듬은 하이칼라 머리가 눈에 띈다. 양복 깃이 넓고, 십자 무늬로 멋을 낸 넥타이도 두껍다. 1930년대 중엽 그 당시 유행하는 패션인 것 같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갸름하게 잘생긴 얼굴이다. 하지만 왠지 부자연스럽다. 흑백사진이라 불분명하지만 얼굴색이 검은 편이라서 그런 것 같다. 늘 양복을 입는 사람이라면 느껴질 자연스러움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서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복장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진 뒷면을 뒤집어 보았다. 이름이 적혀 있다. 러시아어 필기체로 ‘김일수’(Ким-Ир-Су)라고 쓰여 있다.
‘김일수’는 허성택이 러시아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시기에 사용한 이름이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재학할 당시 작성한 자필 이력서가 그를 증명해준다. 거기에는 자신의 본명이 허성택이고 그 외 허국봉, 허성봉이라는 이름도 썼으며, 지금은 김일수라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쓰여 있다.2
실제로 공산대학의 각종 기록에서는 일관되게 김일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입학 첫해 겨울에 작성된 학적부 기록을 보면, 김일수의 학업 성적은 ‘정치 상식’에서는 최우수, ‘모국 문제’에서는 우수 평점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5년 6월7일자 평정서에도 그의 이름은 김일수로 표기돼 있다. 학과장 김단야가 작성한 평정서에 따르면, 김일수는 입학 때부터 그때까지 학업에서나 학과 내 정치·사회 생활 분야에서 가장 열성적인 학생 집단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학업 성취가 빨랐다. 신입생 때에는 지식이 부족했으나, 그사이 큰 진전을 봐서 독립적으로 소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한다. 다만 문장력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문필력은 그저 그렇습니다만 언변은 좋습니다”라고 기재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졸업 이후에는 다른 어떤 업무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선동 분야 사업에 종사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3
공산대학 내에서만이 아니었다.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동안 줄곧 그 이름을 사용했던 것 같다. 보기를 들면 국제당 제7차 대회에서도 그랬다. 허성택은 1935년 7월25일부터 8월21일까지 개최된 그 국제대회에 조선을 대표하는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는 대의원 신상 조사서를 작성하도록 요구받았다. 18개 항목에 걸쳐서 여러 가지 신상 정보를 기재하도록 인쇄된 서식이었다. 그는 각 항목에 응답한 뒤 이 문서의 마지막 페이지 날짜 및 서명란에 ‘1935년 7월17일, 김일수’라고 적었다.4
국제당 제7차 대회는 파시즘의 위협적인 대두에 맞서서 ‘인민전선 정책’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국제대회였다. 그 정책은 조선 같은 식민지 처지에 있는 나라에서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민족통일전선 정책’의 부활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허성택의 출석은 눈길을 끈다. 그가 앞으로 민족통일전선 정책의 부활을 선도하는 역할을 맡게 되리라고 예측되기 때문이다.
허성택이 모스크바에 유학할 수 있었던 동인은 무엇일까. 돈이 많거나 우수한 시험 성적을 올렸다고 해서 모스크바 유학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혁명운동에 대한 헌신성과 투쟁 경력이었다. 허성택이 선발될 수 있었던 것은 함경북도 성진군의 농민조합운동에 헌신한 덕분이었다.
성진 농민조합운동은 1931~1932년 두 해 동안 절정에 달했던 대중적인 농민운동이었다. 그것은 1930년대 함경남북도를 휩쓴 혁명적 농민운동의 한 고리였다. 그중에서도 함경남도의 단천, 영흥, 정평, 홍원군과 함경북도의 성진, 길주, 명천군의 농민운동이 특히 거셌다. 이 운동들은 예외 없이 사회주의 비밀결사가 주도했다는 특징이 있다. 함경도 해안의 농업지대가 광범하게 혁명화했던 것이다.
허성택은 성진군 토박이였다. 아버지는 1.3정보(4천 평) 규모의 농지를 가진 소농이었다. 여러 자식 가운데 맏아들만 중등교육까지 뒷바라지했다. 보통학교를 거쳐 길주농업학교를 졸업하게 했으나, 둘째 아들인 허성택부터는 교육시키지 않았다. 아니, 돈이 없어서 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허성택은 어릴 때는 소를 먹이러 다녔고, 봄가을에는 나무하러 다녔으며, 10살 때부터 농업 노동에 참가했다.
그는 교육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부모는 돈이 없다고 다니지 말라고 하는데도 고집부려서 겨울철을 이용해 한문 서당을 다녔다고 한다. 3개월 통학하는 데 4원의 학비가 들었다. 12살 때부터 6년간 그렇게 했다. 그래서 성인이 됐을 때 국한문 혼용으로 쓰인 일간 신문 지면을 읽을 수 있었다. 일본어는 읽지 못하지만, 한자가 많이 섞인 책은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정도였다.
허성택이 학식이 있어서 농민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아니다. 소년기 이래 농민 사회의 네트워크에 익숙해 있었고, 헌신적으로 농민조합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그는 10대 중반부터 신양소년단에 참가했고, 20살에는 성진청년동맹 학상면지부에 가담했다. 농민조합에 가입한 것은 23살부터였다. 한번 발을 내디딘 이후에는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보기를 들어보자. 1930년 1월, 출옥동지 환영회를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서대문형무소 복역을 마치고 귀환한 3인의 출옥자가 성진역에 도착하자 2천 명 군중을 이끌고 붉은기를 휘날리며 굉장한 시위행진을 벌였다. 허성택은 그 행진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행진은 대대적인 검거 사건의 단서가 됐다. 이른바 제1차 성진농조 검거 사건을 초래했다.
그해 5월에는 메이데이 기념식을 조합원끼리만 산속에 들어가서 비밀리에 거행했는데, 어떤 경로인지 경찰에 발각돼 쫓기게 됐다. 허성택은 이때부터 ‘망명’하게 됐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망명이란 국외로 피신하는 것이 아니라 산속에 토굴을 파는 등으로 거처를 마련하여 산중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1931년 9월에는 학중면 농성동의 지주 김상초 일족 반대운동에 가담했다. 이른바 ‘농성시위사건’은 농민 수백 명이 몽둥이를 들고 지주 쪽 아성인 농성동을 습격한 사건이다. 양쪽에 충돌이 일어나 다수의 부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지주 김상초는 기독교회 장로인데, 교회와 교인들을 이용해 재산을 증식하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농민조합의 비밀을 누설하는 등 관청과 유착한 인물이었다.
1932년 6월에는 성진군 농민조합 중앙부의 임원으로 선임됐다. 제1차 성진농조 사건으로 타격을 받은 집행부 조직의 재건에 참가한 것이다. 그는 아지프로(선전선동) 부장을 맡았다. 그뿐 아니라 사회주의 비밀결사에도 가입했다. 성진군의 공산당 준비기관 설립에 참여해 자위부와 농민부 책임을 맡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외에도 허성택이 참여하거나 지도한 투쟁 사례는 더 많았다. 차용증서 36종, 액면가 6천여원의 빚문서 소각 투쟁, 학동면 수립조합 반대투쟁, 신작로 개설 반대운동, 수동마을 소작쟁의 등이 있었다.
옥중에서 촬영한 한 남성의 사진이 있다. 머리카락을 박박 밀었고 죄수가 입는 수인복 차림이다. 가슴에 성명과 수인번호를 기재한 표시판을 달았다. ‘허국택(許國澤) 729’라고 적혀 있다. 머리 모양은 길쭉한 말머리형이다. 코가 쭉 내리뻗고 좀 두꺼운 듯한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건강해 보이는 30살 청년이다. 눈동자가 카메라 아래쪽을 응시해 표정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간수의 지시에 순응하는 듯하지만 내면의 자아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고투하는 표정으로 읽힌다.
허국택이란 이름은 허성택이 모스크바에서 되돌아온 이후 국내에서 사용하던 가명 가운데 하나였다. 허영식이라는 이름도 썼다. 그래서일까. 형무소 당국이 작성한 허성택의 수감자 카드는 세 종류가 남아 있다. 각각 허성택, 허국택, 허영식이라는 서로 다른 표제 이름을 달고 있지만 내용은 사실상 동일하다. 옮겨적는 과정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허성택이 모스크바에서 귀환한 때는 1937년 3월께다. “김일수 동무의 출발 및 파견시 행동 지침에 관한 요청을 허락한다”는 공문서가 발급된 시점이 그해 3월8일이다.5 그로부터 얼마 안 된 시점에 국경을 넘어서 조선으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그는 지체 없이 함경도 일원에서 사회주의 비밀결사 운동에 복귀했다. 각 군에 비밀리에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복원하는 사업이 그 핵심이었다. 그러나 활동 기간이 길지 못했다. 얼마 안 돼 성진경찰서에 검거되고 말았다.
그의 혐의가 형무소 수감자 카드에 적혀 있다. “공산주의에 공명하고 조선독립을 열망하는 자이고, 성진 농민조합원으로서 학교급 문중의 채권 장부를 소각·폐기하고 자기 행위에 방해되는 자를 구타하여 상해를 입혔다”는 내용이다.6 구체적인 혐의 사항이 모두 1931~1932년의 농민조합 활동에 관련돼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 경찰은 모스크바 유학과 국제당 제7차 대회 사안은 전혀 탐지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허성택의 출소 예정일은 1942년 6월6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41년 3월부터 시행된 이 법령은 ‘재범의 우려가 현저하다’는 검사의 판단만으로 인신을 구속하는 악법이었다. 허성택도 그에 해당했다. 일본 관헌 쪽의 치열한 전향 공작을 뚫고 끝까지 비전향을 고집했던 것 같다. 그는 출감하자마자 예방 구금됐다. 다시 감옥에 갇혔다. 기약 없는 수감생활이 계속됐다. 그는 해방돼서야 비로소 감옥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안태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현장에서미래를, 2005(제2판), 100쪽
2. 김일수, ‘연혁’, 1936년 4월3일, 1-15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40 л.12-20об
3. Зав.секцией Ким-Даня(학과장 김단야), Харатеристика Ким-Ир-Су(김일수 평정서), 1935.6.7.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134 л.10
4. Анкета Ким-Ир-Су(김일수 신상조사서), 1935.7.17, РГАСПИ ф.494 оп.1 д.480 л.72-73об
5. Отношение от 8/Ⅲ-37 г. за N4/585 (1937년 3월8일부 공문서, 번호 4/585),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134 л.2
6. ‘許國澤’(隆熙 2년 5월16일생),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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