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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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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동안 얼지 마, 죽지 마

시월 한파가 앞당긴 겨울,
상추 가지 옥수수 무의 씨를 받고 양파 마늘을 심으며
등록 2021-10-26 07:38 수정 2021-10-27 00:08
2020년 늦가을에 모종을 심어 올해 6월 수확한 양파.

2020년 늦가을에 모종을 심어 올해 6월 수확한 양파.

때 이른 시월 한파는 초보 ‘얼치기 농군’의 가슴에 겁만 잔뜩 심어놓고 갔다. 껍질의 절반도 채 노랗게 익지 않은 함지박 크기만 한 맷돌호박이 벌써 얼면 안 되는데…. 올해 처음 모종 사다 심어 다섯 달 만에 어린아이 주먹만 하게 열린 하늘마 열매는 서리 맞으면 쉬이 썩는다던데…. 뒤늦게 심은 들깻잎의 진한 향이 아직 밭 언저리를 헤매는데…. 언제 온 지도 모르는 이 가을이 기별도 없이 훌쩍 떠나버리면 어느덧 내 나이는 속절없이 쉰 고개를 넘게 되는데….

노년을 향해 가는 이의 인생이 그렇듯 생산을 끝내가는 가을밭은 한없이 쓸쓸하다. 다만 아직 끈을 놓지 않은 맷돌호박이나 가지에 처량하게 매달린 고추 같은 녀석들이 혼자 발걸음한 농군의 시린 마음을 달래준다.

실낱같은 희망은 내년 농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있다. 우선 ‘씨받이’ 구실이다. 이맘때면 상추며 가지며 옥수수며 그 씨를 받아둔다. 대파나 양파, 무도 늦게까지 줄기를 뽑지 않고 놔두면 맨 끝에 꽃이 핀 뒤 씨앗이 맺힌다. 진한 갈색으로 변한 메추리알 크기의 더덕 씨방을 툭 터뜨리면 파리 날개처럼 생긴 씨앗이 후드득 떨어진다. 이놈들을 죽 훑어 하나하나 씨앗을 받아둔다. 배달음식에 딸려 오는 단무지나 각종 소스가 담긴 작은 일회용기를 씻어뒀다가 그곳에 씨앗을 넣고 유성펜으로 이름을 적어놓는다. 꽃 피는 춘삼월에 출동할 예비군들이다.

지금 밭에서 허리춤까지 자라 삶의 끝물을 기다리는 들깨도 지난해 밭에서 거둔 씨앗을 뒀다가 올해 봄에 뿌린 녀석들이다. 집에서 감자탕을 끓이거나 산나물을 무칠 때 한 주먹씩 절구로 갈아 넣으면서도 봄에 뿌릴 양만큼은 남겨둔다. 이게 농부의 마음인가 싶다. 그렇게 이듬해 봄에 모종을 만들어 모내기하려 고이 간직한 씻나락을 한밤에 귀신(쥐로 추정)이 까먹는 소리를 듣는 농부는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이제 시작하는 작물도 있다.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면역 기능 향상 채소로 주목받는 마늘과 양파다. 이 녀석들은 11월 중순께 잘 정리한 이랑에 심는다. 마늘은 동네 오일장에 나온 녀석들 가운데 씨알이 굵고 튼튼한 것으로 골라 반 접가량 사서 한 알씩 떼어 심는다. 물론 파종 일주일 전쯤 미리 거름을 넣어주면 이듬해 봄에 알이 굵은 놈들을 만날 수 있다. 양파는 씨앗으로 뿌리니 너무 조밀하게 나는 바람에 씨알이 잘았다. 지난해엔 솎아내기 귀찮아 종묘상에서 파는 모종을 사다 심었다. 마늘보다 늦은 6월께 수확했는데, 어찌나 단단한지 뿌듯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무릇 대부분 채소는 단단한 게 좋은 거다. 다만 이 철에 심는 녀석들은 볏짚 등으로 잘 덮어줘야 한다. “겨울 동안 얼지 마, 죽지 마”를 외치며.

“그런데 양파농사 지으려면 시장에서 양파를 사다 심으면 되는 거야?” 올해 밭을 사서 농사를 시작한 회사 동료 한 명이 며칠 전 내게 물었다. 원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게 아니냐며…. 험난한 농군의 길에 들어선 동료를 나직이 타일렀다.

“양파 사다 흙에 심으면… 썩을걸요.”

글·사진 전종휘 <한겨레> 사회에디터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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