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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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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처럼, 고통에 중독되는 농사의 맛!

리스크 헤지 방식으로 지은 고추농사, 한 달 내리 수확의 기쁨을 주었네
등록 2021-09-02 09:59 수정 2021-09-03 02:21

올해 고추농사는 대풍이다. 요즘 주말에 밭에 갈 때마다 양동이 가득 따온다. 이렇게 잘될 줄 미처 몰랐다. 옥수수는 비슷한 때에 한 그루당 두어 개씩 한꺼번에 열리는데, 고추는 그렇지 않다. 한 그루에서도 순차적으로 꽃이 피고 진 자리에 시차를 두고 풋고추가 열린 뒤 차례로 붉게 물들어간다. 이쪽 가지엔 작고 하얀 꽃이 새초롬히 피었는데 같은 줄기 다른 가지엔 발갛게 때깔 고운 홍고추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한 달 내리 수확의 기쁨을 준다.

고추를 키우는 이유는 좋은 고춧가루를 얻기 위해서다. 워낙 얼큰한 걸 좋아하는데다 김장김치에 물린 입맛을 살리려 두어 달에 한 번씩 봄동이나 알배기배추 또는 얼갈이배추로 매콤달콤한 겉절이를 무칠 때 필요하다. ‘달콤’은 밭 옆에 자생하는 개복숭아나무 열매와 아카시아꽃, 칡순을 봄에 따서 설탕에 재워 내가 직접 만든 효소액이 맡는다. ‘매콤’은 무농약에 유기질 퇴비를 써서 내 손으로 키운 고추 담당이다. 마음에 쏙 드는 좋은 고춧가루가 부엌 한편에 없는 삶이란 막걸리 없는 두부김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산 고춧가루가 이토록 비싼 줄 미처 몰랐다. 만날 여기저기서 얻어먹던 중 이태 전 동네 마트에 고춧가루 사러 갔다가 라면 봉지 하나만 한 분량을 2만여원에 파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친환경 제품이라 쓰여 있지 않은데도 무척 비쌌다. “내 손으로 직접 좋은 고추를 재배하리라” 마음먹었다.

그해를 어리바리 넘기고 맞은 이듬해, 고추 모종을 100여 주는 심었을까. 처음엔 분위기 좋았다. 줄기는 쑥쑥 자라고 풋고추는 불쑥 열렸다. 그런데 장마 즈음 손가락만 한 고추가 끝부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탄저병이다. 처음엔 작았던 검은 점이 한 주 뒤에 가보면 전체를 물들이고 그 옆과 그 옆의 놈들한테도 번졌다. 얼치기 농군의 마음도 숯덩이가 돼버렸다. 농사가 다 그렇지만, 고추 또한 거저 얻을 순 없단 간명한 진실을 깨달았다.

올해는 잔꾀를 냈다. 많이 매운 고추와 조금 매운 고추 등 다른 품종의 모종을 사다가 두 차례 나눠 심었다. 금융이란 이름으로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사람들이 자산을 채권과 주식, 부동산에 나눠 투자하는, 그들의 언어를 빌리자면 ‘리스크 헤지’(Risk Hedge) 방식의 농사 버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그 때문은 아닌 것 같고, 날씨가 받쳐준 덕에 풍작을 거둔 것 같다.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농사일엔 끝이 없다. 뙤약볕 아래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딴 고추를 말리는 게 큰 문제다. 고추는 잘못 말리면 안쪽에 하얀 곰팡이가 피며 겉이 누렇게 변한다. 이런 고추를 빻아 만든 가루는 몸에 해롭다. 버려야 한다. 그래서 자외선 가득한 쨍쨍한 햇볕에 사나흘 말리면 좋은데, 서울로 출퇴근하는 내가 저지르기엔 위험이 너무 크다. 낮 동안 비라도 내리면 누가 황급히 걷는단 말인가. 특히 올핸 오락가락하는 가을장마 탓에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해가 드는 남향 거실 한편에 신문지와 김장용 비닐을 깔고 그 위에 널었다(사진). 자리 차지에다 계속되는 매운 내에 “치우라”는 식구들의 타박이 끊이지 않는다. 나 혼자 먹을 것도 아닌데… 너무하다.

고된 육체노동에 뒤따르는 심적 스트레스, 이 중복되는 고통에 중독되는 과정이 어쩌면 얼치기 농사의 본질인지도 모르 겠다.

글·사진 전종휘 <한겨레> 사회에디터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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