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털어진 밭은 고왔다. 우유 빛깔이었다. 가을 햇살을 머금으면 반짝반짝한 게 언뜻 밭이 아니라 모래사장 같았다. 4대강 공사를 하기 전 내성천 모래톱이 저런 빛깔이었던가. 그때는 몰랐다. 왜 그런 맑은 빛깔이 났는지. 동네 다른 밭은 안 그랬다. 죄 거무튀튀했다. 멋도 모르고 외쳤다. “새 땅이라 밭도 신생아야, 신생아.”
이제는 인간 농기계가 되어 밭을 갈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돈 들여 운동도 하고 시간 들여 산에도 오르는데 나는 내 밭을 가는 것이니 얼마나 생산적이고 보람찬 일일까 벅찼다. 직사각형 모양의 밭 세로 변에 맞춰 짧고 굵게 여러 이랑을 꾸려보겠노라고 생각했다. 이랑을 만드는 데 필요한 농기계는 무엇인지 폭풍 검색했다. 제품 용도를 읽고, 사용법 동영상을 관람하며 농사에 대한 내적 역량과 의지를 증폭했다. 장바구니에 농기계를 몇 개 넣으니 쇼핑몰 앱이 친절(!)하게도 관련 상품을 자꾸 바꿔가며 또 다른 장비로 유혹했다. “역시 농사도 알고리즘이군!” 현혹된 마음으로 ‘이태리완제품! 유로시스템 Euro5 evo관리기’를 쟁여놓으니 장바구니 금액이 훌쩍 300만원을 넘어섰다. 마음이 멈칫했지만 굴하지 않기로 했다. 세상만사 ‘장비발’ 아닌 게 있던가. 우리가 일은 못해도 장비는 갖춰야지. 무엇보다 사람은 지쳐도 장비는 언제나 살아 움직이지 않는가.
땅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던 2월, 장모님에게 물었다. “언제 밭을 갈까요?” 시답지 않다는 투로 장모님이 답했다. “남들 갈 때, 갈아야지. 우린 처음이라 때를 모르니.” 그렇구나, 다 때가 있는 것이구나. 대체 그 때는 언제란 말인가. 쇼핑몰 장바구니에서 타오른 농사를 향한 나의 의지는 화급히 대농을 향해 달려왔는데, 포천의 다른 밭들은 그제야 듬성듬성 불을 놓기 시작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저런 불은 왜 놓는 것인가. 그때는 몰랐다.
집 앞에서 300평 넘는 밭을 홀로 짓는 80대 할머니(농사 달인, 이하 농달)께 조심스레 물었다. “불을 왜 놓으시는 건가요? 저희도 놓아야 할까요?” 농달은 뭐 그따위 질문을 그렇게 공손하게 하느냐는, 정말 시답지 않다는 투로 답했다. “불이야 타니까 태우는 것이지, 벌레도 잡히고.”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그때는 다 몰랐다.
태울 것이 없어 깨작깨작 삽질을 하던 내게 농달이 물었다. “삼촌, 계분 할 것이여? 다다음주에 철원에서 한 트럭 실어오려고 하는데, 절반 쓸 텨?” 계분은 또 무엇인가. 정말 뭔지 몰랐다. 계분이 무엇이기에 하냐 마냐를 결정해야 하느냐고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임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정적을 삼키는데 농달이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했다. “계분 뿌리고, 트랙터가 와서 이랑까지 다 만들어주고 할 껴. 난 어차피 한차 부르니까 반차 할 테면 7만원이야.” 그렇구나 밭에 뭔가를 뿌리고 기계가 와서 이랑을 다 만들어주는 것이었구나. 유로시스템이 장착된 evo관리기는 필요 없겠구나. “네, 저희도 해야죠. 같이 하시죠.” 농사 신생아에 불과한 나 따위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으리란 걸 처음부터 알았을 농달이 나지막이 말했다. “거기 땅은 농사를 안 짓던 데라 영양이 없어서 땅심이 생기려면 계분을 듬뿍 엎어야 할 텐데.” 계분은 무엇이기에 땅에 영양을 주고 힘도 낸단 말인가. 그때는 몰랐다.
김완 영상뉴스부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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