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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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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그를 죽인 건 빨치산일까 국군일까

일제 때 혹독한 고문으로 하반신 장애 입었지만 다시 비밀결사 조직한 박영발…
6·25전쟁 발발로 늦깎이 러시아 유학 중단하고 빨치산으로
등록 2021-05-27 14:28 수정 2021-05-28 00:38
경북 봉화군 내성면 화천리 176번지 박영발 생가. 임경석 제공

경북 봉화군 내성면 화천리 176번지 박영발 생가. 임경석 제공

*제1361호 ‘피살 51년 만에 발견된 빨치산 비밀 아지트의 주인공’에서 이어짐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282.html

박영발이 앉은뱅이가 될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당한 까닭은 무엇일까. 체포된 다른 동료들도 비슷한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그에게 혹독함이 부가된 이유가 있었다. 경찰 문서에 그 정황이 암시돼 있다. 동대문경찰서장이 작성한 검사국 앞 송치의견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박영발은… 소지하고 있던 서신을 삼키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뒤이어 정길성의 주소에 대해 취조를 받자, …파고다공원 5층탑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는 등 거짓말을 했다. 정길성이 잠복한 주소를 알면서도 그를 도망케 할 목적으로 사실을 공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 당시에는 정길성의 소재를 놓쳐서 체포할 수 없었다.”1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을 떠날 즈음에 촬영한 36살 박영발. 임경석 제공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을 떠날 즈음에 촬영한 36살 박영발. 임경석 제공

비밀 서신 삼키려다 미수… 혹독한 고문

피의자의 허위 진술에 농락당한 일본 경찰의 분노가 선명히 떠오른다. 박영발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편지지를 씹어 삼키려 했다. 동료의 거처를 감추고자 거짓말도 했다. 서슬이 시퍼런 일본 경찰에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그의 거듭된 기만행위로 경찰은 주요 피의자를 놓치고 말았다. 경찰은 그를 용서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게 틀림없다.

박영발은 대가를 치렀다. 1932년 9월2일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피투성이가 되어 동료의 등에 업혀서 경찰서 문을 나와야 했다. 그뿐인가. 앉은뱅이가 된 채로 4년이나 고향에서 갇혀 지내야 했다. 이 참혹한 사건은 박영발이 20살 때 겪은 일이다.

1936년 5월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박영발은 생업의 길로 나아갔다. 당시 그는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16살 되던 1928년 이미 부모의 뜻을 좇아 2년 연상의 아내와 혼인식을 올렸다. 그는 어린 자녀 하나와 부친에게서 소박맞은 어머니를 부양해야 했다.

박영발은 봉화읍내 인쇄소에 취직해 2년간 문선공으로 일했다. 하지만 벌이가 시원찮았던 것 같다. 그는 대도시로 향했다. 만주를 거쳐서 중국 북경으로 갔다. 그곳에서 1년8개월간 동향 사람이 경영하는 양복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이어서 1940년 서울로 되돌아와 제화공장에서 4년8개월간 경리 사무직으로 근무했다.

“1944년 7월에 정재철, 신정균 등 동무와 함께 적은 크룹을 조직하였다. 처음에는 ‘무명 크룹’으로 그 후 혹은 ‘서울 크룹’이라고도 하였다. 책임자는 정재철 동무이며 나는 조직을 담당하였다. 영월탄광의 박항택, 영주의 김제욱, 대구의 김일식, 부평조병창 공사장의 한종일 등 동지를 통하여 조직을 키우기에 힘썼다.”2

박영발이 비밀결사에 다시 가담한 것은 32살 때인 1944년 7월이다. 해방되기 1년쯤 전이다. 조그마한 ‘크룹’이었다고 한다. 크룹이란 러시아어 클루프(клуб)에서 온 외래어로 영어의 클럽(club)에 해당한다. 클럽과 그 일본식 음역어인 구락부란 말이 주로 취미나 문화적 코드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데 반해, 크룹은 당조직이나 정치단체의 한 형태를 가리키는 뉘앙스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한 무리의 비밀운동 참가자들이 둘 이상의 소조직으로 나뉘어 일정한 연계를 갖는 조직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하나의 독립적인 비밀단체를 가리키는 크루조크(소조)와 구별됐고, 다수의 세포단체와 그를 총괄하는 집행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그루파(그룹)와도 달랐다.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생으로 추천하기 위해 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이 작성·서명한 박영발 평가서. 1948년 7월31일자. 임경석 제공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생으로 추천하기 위해 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이 작성·서명한 박영발 평가서. 1948년 7월31일자. 임경석 제공

탄광과 무기공장에서 노동자 조직화

비밀결사 구성원들은 어떤 사람이었나. 박영발의 기록에는 구성원이 7명 나온다. 더 있겠지만 그중 역할이 뚜렷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 4명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30대 초중반이었다. 또 20대에 사회주의운동에 참가한 공통 경력이 있었다. 다들 적색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운동 참가자였다. 출신지의 공통성도 눈에 띈다. 각각 영주(1명), 봉화(2명), 대구(1명)였다. 다들 경북 출신자였다.

비밀단체 ‘서울 크룹’의 책임자는 정재철이었다. 그는 12년 전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박영발을 업고 나왔던 바로 그 사람이다. 박영발은 조직부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그가 역점을 둔 분야는 노동자 조직이었다. 특히 노력을 기울인 곳은 둘이었다. 하나는 영월탄광인데 이곳에는 수천 명의 탄광 노동자가 전시 에너지 공급을 위해 동원돼 있었다. 다른 한 곳은 부평조병창이었다. 이곳은 1939년 설립된 ‘인천육군조병창’이란 명칭의 대규모 무기공장으로서 일본의 대외 침략전쟁을 뒷받침하는 조선병참기지화 정책의 상징이었다. 그곳에는 1만 명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3

전쟁 말기에 접어들자 무기 생산 능력 확대를 위해 조병창 인근에는 토목·건설 공사가 쉼 없이 계속됐다. 그 공사장이 서울 크룹의 조직을 확대하는 무대가 됐다.

비밀결사 결성 이후 근 1년 만에 핵심 멤버들이 경찰에 붙잡히는 위기가 찾아왔다. 창립 멤버 신정균이 1945년 5월 체포된 데 이어, 책임자 정재철과 대구 조직을 담당했던 김일식이 검거됐다. 하지만 이내 8·15 해방이라는 천운이 따랐다. 체포된 이들은 풀려났고, 비밀결사 조직은 유지됐다.

해방 후 불과 10일 만에 박영발과 동료들은 조선공산당재건준비회와 연결됐다. 사회주의 진영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그룹과 합류한 것이다. 박헌영이 이끄는 이 대열과 결합한 것에 박영발은 진정으로 기뻐했다. 과거에는 소규모 경험주의적인 조직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이제 이론과 사상적 결핍을 극복하고 체계적으로 올바른 조직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노라고 자부했다. 그리하여 그해 9월20일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당증번호 1168번을 받았다.

모스크바 당학교에서 발급한 1950년 7월25일자 박영발 성적표. 임경석 제공

모스크바 당학교에서 발급한 1950년 7월25일자 박영발 성적표. 임경석 제공

36살 모스크바 유학… 최상 레벨 성적

박영발은 합법 대중운동에도 진출했다. 해방 전부터 관계해오던 부평 지역 중심의 토건노동조합운동이 기반이 됐다. 해방되던 그해 9월 이미 경성토건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1월에는 전국 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결성에 참여하고 서울지방평의회 부위원장 겸 중앙위원으로 취임했다. 전평은 그의 주된 활동 거점이었다. 1947년 2월에는 중앙상임위원회 조직부 부책임자 직위에 올랐다.

비밀 당조직 활동도 열심히 했다. 입당과 동시에 토건세포 책임자가 됐고, 머지않아 서울시당 중구위원회 선전책, 서울시당 노동부 부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나중에는 중앙당 노동부 소속 실무 간부로까지 진출했다. 당내에서도 노동조합 관련 직책에서 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격렬한 대중투쟁을 지휘한 경력도 있었다. 그는 1946년 9월 총파업과 1947년 3·22 총파업 당시 두 차례에 걸쳐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 총무부 책임자를 지냈다. 전국적 총파업 투쟁을 중앙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진두지휘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박영발은 해방 이후 정국에서 당과 노동조합 양 부문에서, 그리고 총파업 투쟁의 지휘 방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위치를 점했다.

이 때문에 그는 장래 당조직을 이끌 중견 지도자로 지목받았다. 최고위 간부 교육을 이수할 자격이 있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1948년 7월 그는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36살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모스크바 조선노동당 간부학교 입학 대상자로 추천됐다. 부위원장 박헌영이 서명한 평가서가 남아 있다. 거기에는 박영발이 노동자들을 열성적으로 조직해왔고, 민주조선 건설 사업에 헌신했음을 인정한다는 문장이 쓰여 있다.4

6·25전쟁이 아니었다면 그의 유학 기간은 더 길었을 것이다. 그의 수학 기간은 1948년 9월15일부터 1950년 7월1일까지다. 2년 동안 그가 거둔 학업 성적표가 있다. 박영발은 도합 14개 과목을 수강했다. 시험 점수가 명시된 12개 과목 가운데 10개 과목에서 5점 만점을 받고, 2개 과목에서 4점을 받았다. 최상 레벨의 학업성적을 올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영발은 전쟁이 발발한 고국으로 급히 되돌아왔다. 러시아 유학에서 돌아온 박영발에게 주어진 보직은 전라남도당 위원장이었다. 그는 북한군 제6사단이 전남 광주를 점령한 뒤 1950년 8월 초 임지에 부임했다.

3월19일 vs 2월21일 두 개의 사망일은 왜?

박영발의 사망 일자에 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하나는 1954년 3월19일 국군 토벌대에게 교전 중 사살됐다는 기록이다. 사망 직후 신문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4인조로 이뤄진 국군 수색대가 반야봉 일대에서 작전하던 중 ‘무장공비’들이 은신한 동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에 박상옥 중사가 단독으로 동굴 속에 돌입해 공비 3명을 사살했는데 그중 하나가 재산(在山) 공비를 지휘하던 박영발이었다는 것이다. 박 중사는 이 전공으로 금성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5

또 하나의 견해는 박영발 사후 51년이 지난 뒤에야 나왔다. 빨치산 동료였던 박남진이 박영발 죽음의 진상을 언론에 공개적으로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박영발의 사망 일자는 1954년 2월21일이다. 전투 중 치명상을 입고 절망감에 빠진 한 동료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비밀 아지트 내에서 총기를 난사했고, 그로 인해 박영발을 포함해 대원 3명이 사망했다는 증언이다. 문제의 난사범은 다른 빨치산에게 사살됐다고 한다.6

두 가지 상이한 견해 가운데 박남진의 증언이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된다. 증언 내용이 구체적이고 피살 정황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박영발과 함께 전남도당 소속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생존자들도 이 날짜에 맞춰서 추모제를 지냈다고 한다. 더욱 신빙성이 느껴진다. 토벌대 쪽 3월19일 설도 모순 없이 해석할 수 있다. 주검이 발견된 날짜인 것 같다. 전공을 탐하는 수색대가 교전 후 사살했노라고 허위 보고를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사망 일자를 확인하는 문제는 망자의 제사를 지내는 입장에서 보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상이한 견해를 대비해본 까닭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京城東大門警察署 道警部 奈良坂性依, ‘意見書: 孔元檜 外 28名’, 70~71쪽, 1932.10.18,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85-국편-0262-0002
2. 박창일(본명 박영발), <자서전>, 2~3쪽, 1948.8.9,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2~14об
3. 이상의, ‘구술로 보는 일제하의 강제동원과 인천조병창’, <동방학지> 188, 108쪽, 2019
4. Зам.Председатель ЦК Трудовой партии Южной Корея Пак Хенен(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инструктора отдела труда ЦК Трудовой Паприи Южной Кореи, Пак Ен Бала (남조선노동당 중앙위 노동부원 박영발에 대한 평가서),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3 л.7 1948.7.31.
5. ‘從軍落穗 지리산’, <동아일보> 1954.4.12.
6. 김경대 기자, ‘박영발 위원장, 동지가 죽였다’, <시민의소리> 200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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