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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영수증] 다시 여행자의 마음으로

망운산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참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구나’를 깨닫다
등록 2021-01-04 00:53 수정 2021-01-04 00:55
남해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면서 우린 다시 여행자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남해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면서 우린 다시 여행자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얼마 전, 우리 마을에 같이 사는 한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시간 되는 주말에 언제 한번 패러글라이딩 타러 같이 가지 않을래?” 언뜻 예전에 지인에게서 남해에서 하는 패러글라이딩이 정말 굉장한데 잘 홍보되지 않아서 아쉽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마침 남편도 패러글라이딩을 타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비용은 좀 들지만 남해에서의 좋은 추억이 될 듯해 흔쾌히 친구를 따라나섰다.

‘남해에 패러글라이딩 하러 오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분명 예약할 필요 없이 한산하리라고만 생각했던 패러글라이딩장은 예상보다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대부분 남해에 놀러 온 관광객으로 보였다. 예약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다행히 우리는 몇 주 전 예약한 친구 덕분에 그날 마지막 순서로 비행장으로 향했다.

하나, 둘, 셋, 뛰어! 구령에 맞춰 남해에서 가장 높은 산, 망운산 정상에서 힘껏 뛰어내렸다. 1천m 상공에 오르니 남해는 물론 여수, 광양, 순천, 하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바다와 지는 해도 멋있었지만 특히 아기자기하게 겹겹이 쌓인 계단식 논, 다랑논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분명 마을을 걸으며 자주 보던 다랑논 풍경인데,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완전히 색다른 모습이었다. ‘참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구나.’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가끔은 여행자의 시선이 필요하다. 연고도 없는 낯선 시골 마을로 이주한 뒤 모든 게 새롭고 특별하게 느껴졌지만 알게 모르게 많은 것에 금세 익숙해져버렸다. 매일 감탄하던 남해의 자연도 마찬가지다. 마을 어르신들이 “어디 가냐?” 하고 물으시면, 늘 “바다 보러 가요!” 아니면 “노을 보러 가요!” 했다. 그럼 어김없이 뒤따르는 말은 “매일 보는 걸 뭘 또 보러 가냐”였는데, 이상하게 매일 똑같은 곳에 서서 비슷한 풍경을 봐도 자꾸 카메라를 들고 찍고 또 찍게 되었다.

요즘은 일주일 동안 단 한 번도 바다에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조금만 걸어나가면 되는데 말이다. 서울에 살며 정작 단 한 번도 남산타워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많다던데, 사는 곳이 어디든 익숙해지면 자주 빛나는 순간을 놓치게 되나보다. 문 열고 마당에 나가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밤하늘에 별이 가득하지만, 날이 갈수록 밤에 산책하는 일도 줄었다. 시골에서 보내는 일상이 어느새 도시에서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평일 대부분 시간은 사무실 책상 앞에서 보내고, 주말엔 웬만하면 집 밖이나 마을 밖에 나가지 않는다.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 여러 채널을 오가며 영화나 밀린 예능 프로 몇 편을 연달아 보고 침대에서 뒹굴뒹굴하고 나면 벌써 월요일이다.

그사이 가을이 깊어졌다. 단풍으로 물들어, 남쪽 끝자락에 놓인 남해의 산들도 이제 짙은 가을색이 완연하다. 가야지 가야지 하고서 미루기만 했던 가을 나들이를 더 늦기 전에 떠나야 한다. 단풍이 모두 져버리기 전에 말이다. 그러니 이번 주말에는 꼭, 주민이 아닌 여행자가 되어야겠다.

남해=글·사진 권진영 생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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