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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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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문학상 가작 수상작] 오늘의 팀

제12회 손바닥문학상 ‘차별’ 주제 공모 가작 수상작
등록 2020-12-27 15:06 수정 2020-12-29 08:43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순옥은 죽기로 결심했다.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까스로 사는 것이 귀찮아졌다. 젊은 아이들은 인터넷으로 죽는 방법을 찾아보고 같이 죽을 사람을 구하기도 한다지만 순옥은 그런 것들을 할 줄 몰랐고 안다 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는 것에 방법이 있을 리가 없고 같이 죽어줄 사람이 있다는 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죽는 일만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순옥은 다시 결심했다.

박 반장은 일찍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새벽잠이 없는 나이 많은 미화원들이 출근 시간인 새벽 6시보다 일찍 나오는 일이 잦아지자 점점 그게 일반화됐고 대부분의 미화원이 5시면 청소를 시작했다. 일찍 시작하고 일찍 마치기 위해서였다. 순옥도 처음에는 5시30분에서 6시 사이에 출근해서 대걸레를 빨고 고무장갑을 챙기고 각종 세제를 준비하곤 했지만 5시도 되기 전에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눈치가 보였다. 사실 순옥의 집에서 근무지인 방송사가 있는 여의도까지 오려면 5시30분도 벅찼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첫차를 타고 온다 해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5시30분에 도착하는 순옥이 거의 꼴찌로 일을 시작하다보니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옥은 일찍 일어나서 첫 번째 버스를 갈아타는 곳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평생 남의 눈에 띄는 일은 하지 않았고 뭔가 폐를 끼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견디지 못했던 순옥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쪼매 더 일찍 자면 되재, 뭐.’ 순옥은 그렇게 생각하고 다음 날부터 실천했다. 하지만 청소 용역들이 6시가 아닌 5시부터 근무하자 회사 노조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미화원들이 일찍 일을 시작한다고 해도 정해진 시각에 퇴근해야만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초과근무로 이어지곤 했고 사 쪽과 다른 문제로 대립하던 노조는 부당한 초과근무라며 언론에 제보했다. 미디어 전문지에서는 이걸 크게 문제 삼을 작정이었다.

그래서 순옥은 결국 5시도 아닌 5시30분도 아닌 6시에 출근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반장은 그냥 그렇게 통보했다. “6시 전에는 오지 마세요. 새벽에 잠이 안 와서 일찍 오게 되더라도 근처에서 뱅뱅 돌다가 6시 정각에 회사 문을 여는 겁니다. 그냥 군말하지 마시고 그렇게 하세요.” 급기야 박 반장은 6시 전에 출근하는 청소 용역원 명단을 작성해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순옥은 그날만큼은 6시 전에 와야만 했다. 죽기로 결심한 다음 날, 죽어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순옥의 계획은 그랬다. 건물의 가장 높은 층까지 올라가 뛰어내리는 것. 그러려면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야 했고 담당 구역 청소를 미리 끝내놔야 했고 사람들이 자신의 물건을 치워야 하는 폐를 끼치지 않도록 정리해야 했다. 그래서 그날만큼은 불이익을 당할 각오를 하고 일찍 회사 정문에 들어서야만 한다. 순옥에게 내일부터는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 일어나는 일은 순옥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이 자기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기상하는 날이라고 생각하자 좀처럼 잠들기가 어려웠다. 전날 퇴근한 뒤 순옥은 미리 저녁밥을 챙겨 먹고 집 안을 깔끔히 정리했다. 정리할 것이 많지도 않았다. 독거노인이 죽으면 가장 문제되는 것이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겠지만, 순옥은 스스로 죽기로 결심하고 회사에서 죽은 채 발견될 것이 분명한 만큼 냄새나고 썩은 시체를 처리해야만 하는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옷가지랄 것도 없었고 처분해야 할 가구랄 것도, 그 흔한 가전제품도 순옥에게는 많지 않았다. 선풍기조차 없이 여름을 난 지가 여러 해째였다. 단지 통장에 들어 있는 얼마의 돈은 잠시 순옥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장례를 치르는 데 돈이 필요할 테고 그 돈이 분명 거기에 쓰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순옥은 통장 위에 도장을 올려놓고는 이제 자야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자자, 자자. 자야 일어나재. 자야 뒤지재.’ 그렇게 순옥은 생애 마지막이 될 몇 시간의 잠을 위해 이불을 덮었다.

김 팀장은 며칠째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지난 3월부터 맡은 팀장 업무 때문에 주말 녹음 프로그램을 배정받았고 이번 주 녹음은 이미 해놓은 상태였기에 회사 업무에 큰 지장을 초래하진 않았지만 특별한 사유도 없이 며칠째 무단결근을 한다는 게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부장과 국장은 김 팀장의 부인, 인정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긴 했다. “죄송해요. 남편이 며칠 갈 데가 있어서 회사에 나가지 못한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오는 대로 연락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인정은 전화기 너머에서 허리를 굽실거릴 것이 분명한 목소리로 연신 죄송하다고 말했다.

부장과 국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일단은 기다려보기로 했다. 정권이 바뀌자 간부들이 줄줄이 낙마했고 3월에는 대대적인 개편과 인사이동이 있었다. 3월 이후 자리를 꿰찬 간부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후배들을 중간 간부로 앉히면서 부장, 국장, 팀장들도 대폭 물갈이됐다. 하지만 사람이 바뀌었다고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줄서기와 자기 사람 챙기기가 승진을 좌우했고 프로그램 배정에도 적용됐다. 그런 상황이 바뀌지 않는 것에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개편 이후 한 달이 지났을 때 남편은 휴직계를 내겠다고 인정에게 말했다. 인정은 남편 상태를 걱정하며 지켜봐왔다. 작은 불합리에도 마음을 쓰고 여린 것에 각별히 맘을 주는 남편 성격을 아는 인정은 그에게 분명 무언가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남편은 쉽사리 말하지 않았고, 인정은 그것이 회사 내의 일과 관련됐으리라 짐작만 했다. “그래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그런데 휴직을 내고 돌아오면 바뀔까? 조금 더 버티면서 상황을 보는 건 어때?” 인정의 말에 남편은 멀리 시선을 줄 뿐 대답하지 못했다.

휴직계를 내겠다는 김 팀장의 말에 국장은 어깨에 손을 올려 두드리더니 상관없는 답을 했다. “야, 조금만 기다려봐. 네 동기 중에 부장 단 애도 있지만 걔 오래 못 갈 거야. 너 능력 있는 거, 다 알아. 기다려. 너도 금방 부장 달 거야. 조급해하지 말고.” 부사장과 점심 약속이 있다며 서둘러 나가는 국장을 김 팀장은 더 잡을 수 없었다. 국장은 그날도 김 팀장의 휴직계에 사인하지 않은 채 퇴근해버렸다.

순옥은 언제나 자기에게 배정된 구역만큼은 깔끔하게 해냈기 때문에 박 반장은 웬만해선 순옥에게 잔소리하거나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그런 순옥에게 박 반장은 항상 가장 일이 서툴고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파트너로 배정해주는 편이었는데 지금까지 순옥은 그런 상황에 큰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순옥에게 여러 가지로 중요한 날이기에 신경 쓸 일이 없기를 바랐다. 하필이면 국장실이, 하필이면 오늘이 첫 출근인 신입 미화원이 순옥에게 배정됐다.

순옥은 계획대로 6시 전에 회사에 도착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5시34분. 출근부에 시간을 기록하고 청소복장으로 갈아입은 시각이 49분. 자신의 물건을 정리하고 최대한 빨리 국장실을 청소할 계획이었다. 버릴 소지품은 미리 버리고 오늘 배당된 청소를 마치면 순옥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순옥과 오늘의 팀이 된 신입 미화원은 강자였다. 박 반장이 순옥과 강자를 서로 소개해줬을 때는 이미 6시가 한참 지나 있었다. 순옥은 급한 마음에 어서 일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일을 설명해줘야 했다. 이곳에선 미화원 몇 명이 일하고 나이는 대략 어떻게 되는지, 서로를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고 선배에겐 어떻게 대하는 것이 알맞은지. 그리고 방송사 직원들, 특히 높은 사람들에겐 어떻게 인사하고 주의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지 말이다.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다면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 결국은 그랬다. 누군가에겐 필요하지만 결국은 필요 없는 이야기들. 하지만 그런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으면 나중에 이런 소릴 듣게 된다. “순옥씨, 그런 것도 안 가르쳐주고 뭐 했어요?” 또는 “아니 그런 걸 알려주셨어야지. 청소가 중요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몇 번 그런 얘길 듣고 난 뒤 순옥은 박 반장이든 누구든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신입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설명하고 알려주었다.

그날은 신입을 눈여겨볼 겨를이 없었지만 순옥은 역시 평소처럼 강자에게 몇 가지 사항을 주지시켰다. “높은 사람들 방일수록 더 깨깟하게 해야 됩니데이. 팀장 자리보다 부장 자리를 더 신경 쓰셔야 되고예, 부장보다는 국장을 엄청 신경 써갖고 닦고 쓸고 해야 된다 이 말입니더.” 강자는 대체로 표정이 없는 얼굴로 순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좀처럼 입을 열어 대답하거나 질문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의욕을 보이는 사람일수록 일찍 이 일을 관둔다는 걸 아는 순옥으로서는 강자의 그런 태도가 오히려 믿음직해 보였다. 하지만 이래저래 상관없는 일이었다. 강자가 앞으로 해나갈 일들이 순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다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될지 순옥은 알 수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집이다, 이래 생각하고 깨깟하게 하시면 돼요. 빌 거 없죠, 뭐.” 자신이 앞서고 강자는 뒤를 따르게 했다. “여러 말 씨부리는 거보다도 보면서 따라 하면 금세 늡니더.” 순옥은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다. 일일이 방법을 묻지도 않았고, 어떻게 하면 금방 익숙해질까 따지지도 않았다.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는 일처럼 강자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건과 일은 그저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손을 들어 항의하거나 의문을 표하거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럴 권리가 그녀에겐 없다는 것이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모두의 생각이었다.

국장실 휴지통을 비우고 국장의 의자 밑을 비롯해 방 구석구석을 대걸레로 닦고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강자도 잘 따라왔다. 바닥 왁스 작업이 복병이었다. 왁스 작업은 베테랑 미화원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바닥을 먼지 한 톨 없이 닦아내야 하고 그 위에 다목적 세척제를 발라야 한다. 다음으로 무겁고 시끄러운 마루광택기를 이용해서 다시 깨끗하게 세척한 다음 남아 있는 물기나 세제 잔여물을 없애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대형 선풍기를 돌려야 하고 채 마르기도 전에 누군가 밟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낭패다. 충분히 건조한 뒤에도 일이 끝난 게 아니다. 수지왁스를 두 번 정도 바닥에 더 발라야 하는 거다. 힘도 들고 기술도 필요하고 역겨운 냄새도 견뎌내야 한다. 그러니 신입 미화원인 강자에게 이런 일이 달갑지 않게 느껴지리란 건 어쩌면 당연했다.

대체로 무표정하던 강자가 다른 태도를 보인 곳도 왁스 작업을 해야 하는 국장실이었다. 책장을 걸레로 훔치다 말고 서류를 꺼내보기도 했고 서랍을 벌컥벌컥 열어보기도 했다. “그란 데는 안 닦아도 됩니더. 잘못했다가 왜 만졌냐고 애먼 소리 들어요.” 순옥이 말려보기도 했지만 강자는 입을 앙다물고 마치 여기저기 뒤지듯 국장 방을 돌아다녔다. “강자씨! 여기 말리야 되는데 그래 댕기면 우짭니까? 예에?” 순옥이 큰소리를 치자 그제야 강자는 눈을 깔고 뒤로 물러섰다. 순옥은 맘이 급했다. 그래서 오늘만은 왁스를 한 번만 바르기로 했다. 벌써 8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저기요.” 순옥은 돌아보지 않았다. “저기요!” 일을 빨리 끝내려는 순옥이 왁스를 거의 다 발라갈 때쯤 강자가 순옥을 불렀다. 정신없는 순옥은 강자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강자는 순옥의 오른쪽 팔소매를 붙들었다. “저기요, 선배님. 저 잠깐만 나갔다가 올게요. 숨쉬기가 너무 힘들어서요.” “뭐라꼬요?” 순옥은 잠시 광택기를 껐다. “아, 제가요, 숨을 쉬기가 너무 힘들어서 잠깐 밖에 나갔다 온다고요.” 순옥은 탐탁지 않았지만 그러라고 했다. 숨쉬기 힘들다는 사람에게 내가 오늘 죽는 날이니 조금만 참으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빨리 와야 됩니데이. 알겠지요?” 순옥은 당부 또 당부했다.

강자를 보낸 뒤 순옥은 마지막 사치를 부리기로 마음먹었다. 국장실 믹스커피를 종이컵에 탈탈 털어 넣고 정수기의 빨간 버튼을 누르는 일. 그리고 창밖의 수목을 보는 일. 거기엔 큰 공원이 있었는데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청소에 바쁜 순옥에겐 좀처럼 공원의 수목을 감상하는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피어나는 온갖 꽃과 푸른 나뭇잎들. 그리고 조깅이나 자전거 타기 따위의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소음이 순옥에겐 그저 소리로만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달달한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을 구경하는 오늘의 이 순간을, 장면을 순옥은 생애 마지막 눈요기로 남기고 싶었다. 분주했던 그녀의 일생이었지만 마지막만큼은 고요하고 싶은 것이 순옥의 바람이었다.

순옥을 부르는 박 반장의 거친 소리가 들린 건 강자가 방을 나가고 순옥이 커피를 세 모금쯤 마신 뒤였다. “김순옥씨! 김순옥씨!” 박 반장은 국장실로 이어진 복도 끝에서부터, 아니 이미 그 전부터, 아니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멀리서부터 순옥을 부르며 뛰어왔다. 순옥은 대형 선풍기의 날개 돌아가는 소음에 묻힌 박 반장 소리를 뒤늦게 알아채고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 “아니 사람이 부르는데 왜 안 나와보는 겁니까? 네? 지금 난리 났다고요.”

지난달 왁스를 바르고 건조시키고 있는데 그날따라 일찍 회사에 온 국장이 복도에서 미끄러진 적이 있었다. 그날도 박 반장이 호들갑을 떨며 환경미화원들을 집합시키고 난리를 피운 적이 있던 터라 순옥은 또 누가 미끄러졌나 생각했다. “왜 그러시는데예?” “오늘 처음 온 그 그 아줌마 있잖아요.” “누구요? 나하고 팀 된 아줌마요?” “그래요, 그 아줌마. 그 아줌마가 지금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내리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단 말이에요!” ‘그건 전데예’ 하고 말하려다 말고 순옥은 잠시 눈을 치켜뜨고 눈동자를 한 바퀴 돌렸다. 사실이 그랬다. 국장실 청소만 마치면, 강자에게 대강의 일만 알려주면, 옥상으로 올라가서 뛰어내릴 사람은 자신이었다.

강자는 정말 거기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순옥은 강자에 대해 이름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대개의 경우 신입이 오면 어디에 살고, 남편은 뭘 하고, 애들은 몇이나 되고, 손주는 있는지, 이 일을 언제부터 했는지 등 신상조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오늘 순옥은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고 더 이상 그래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과연, 정말,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것이 기쁜 일일까? 즐거운 일일까? 기분 좋은 일일까? 결국은 나도 누군가를, 누군가도 나를 알게 된다는 것을 반가운 척하면서 살아온 것이 아닌지.

“순옥씨, 저 아줌마 이름 뭐였죠?” 박 반장은 이름조차 몰랐나보다. “강자씨잖아예.” “아, 맞다. 강자. 그런데 저 아줌마 왜 저래요? 응? 옥상에 올라가서 왜 뛰어내리겠다고 저러는 거냐고. 아, 미치겠네. 정말.” 박 반장 주변으로 이제 막 출근한 직원들이 몰려 있었다.

강자는 대체 어떻게 올라갔는지 본관 옥상에서 ‘내 딸을 살려내라’라고 쓰인 커다란 종이를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쁜 놈들아, 이것들아, 내 딸 살려내라. 이것들아, 이 쳐 죽일 것들아, 시발놈들아!” 강자의 목소리가 저랬나, 순옥은 생각했다. 불과 몇 시간 전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인사하던 그 강자가 맞나 싶었다.

국장의 전화를 받은 인정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작은 요양원에 전화해야 했다. 휴직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남편은 도망치듯 그곳으로 가야만 했다. 도저히 출근할 수 없는 상태로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남편을 위해 요양원을 알아본 것도, 남편의 회사에 전화해 무단결근에 대한 변명을 둘러댄 것도, 병가 처리를 요청한 것도 인정이었다. 남편이 그곳에 간 이후 인정은 아이가 다쳐 응급실에 갔을 때도 전화하지 않았다. 다섯 살 아이를 위해서라도 힘을 내라고 조금만 더 버티라고 말해왔지만, 사실은 남편의 부재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자신 때문에 인정은 남편을 보내지 못했다. 하지만 막상 남편이 사라지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자신은 어쨌든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편의 프로그램에서 일했던 작가의 어머니가 방송사 옥상에 올라가 투신하겠다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전화를 받자, 인정은 결국 요양원으로 연락해야만 했다. 남편에게 닿기 위해서는 담당의사에게 먼저 용건을 얘기해야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가게 되면 이제 막 안정되기 시작한 남편분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질 가능성이 큽니다. 아내분이 알아서 상황을 해결하실 순 없나요?” 남편이 떠난 지 일주일가량밖에 되지 않았지만 인정의 삶에서 남편은 이미 멀리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정은 전화를 내려놓고 방송사에 가기로 했다.

방송사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119 구급차가 여러 대 와 있었고 다른 방송사와 신문사의 취재 차량들도 보였다. 인정은 다시 걸려온 부장의 전화를 받으며 택시에서 내렸다. “지금 차에서 내렸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아니, 김 팀장이 와야 하는데 부인이 오시면 어떡합니까?” “죄송해요. 남편 의사가 외출을 허락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집들이 때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국장은 사색이 된 채 인파 속에 끼여 있었다. “여깁니다, 여깁니다.” 국장은 인정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지금 그가 잡을 수 있는 게 그거밖에는 없어 보였다.

남편과 통화할 수 없었고 당연히 지금 이 상황을 전하지도 못했다고 하자, 국장은 눈을 감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과연 옥상에는 60살 전후로 보이는 한 아줌마가 쉬지도 않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고, 국장은 저 아줌마가 김 팀장 프로그램에서 일하던 작가의 어머니라고 말하며 전화로 이미 했던 얘기를 다시 늘어놓았다. 인정이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 작가가 어떻게 된 거예요?” “몰라요? 모른다고요? 못 들었어요, 김 팀장한테?” 국장은 다시 눈을 감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돈도 몇 푼 안 주면서 어 어 커피 타라, 복사해라, 뭐 가져와라, 종처럼 부려먹고 어어 그래놓고 자를 때는 사람을 무슨 개 취급하고 어어 내 딸이 작가 된다고 얼마나 고생고생을 했는데 어어 겨우겨우 막내 떼고 자기 프로 맡았다고 좋아서 케이크까지 불고 그랬는데….”

강자는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마치 마이크를 잡은 듯 쩌렁쩌렁 울렸다. 이미 방송사 앞은 수많은 검은 머리들로 물들었는데 벚꽃이 지고 난 자리에 소복소복 돋아난 바로 옆 공원의 푸른 새싹들과 묘하게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음을 모두 소거해버린다면 흡사 여의도 축제라도 벌어진 모양새였다. 하지만 연이어 출동한 119 구급차와 경찰차, 앰뷸런스의 소음, 그리고 강자의 강력한 울부짖음에 구경꾼들의 웅성거림과 기자들의 리포트 소리가 더해지자 축제가 기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순옥과 인정은 급하게 국장실에 불려갔다. 순옥은 박 반장과 함께, 인정은 자신의 가방을 어깨에 멘 채 국장실 짙은 갈색 소파에 주저앉았다. 순옥은 불과 몇십 분 전 이곳을 강자와 함께 쓸고 닦았다는 사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강자는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며 자기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는데 그런 강자가 왜 저 꼭대기에 올라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까? 순옥은 잠시 고개를 들어 옥상이 있는 쪽을 곁눈질로 올려다봤다.

박 반장은 안절부절못한 채 순옥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아줌마?’라는 말을 눈빛으로 쏘아대고 있었다. 부질없는 눈짓에 제동을 건 건 국장이었다. “음, 제가 지금 침착해야 하는데… 아…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이 이 사태를 좀 해결해줘야겠어요. 어, 뭐랄까… 한 팀이다 생각하시고 말이죠… 이 지금 이 시급한 문제를….” 그때 부장이 국장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국장은 소파에 앉은 사람들을 일일이 훑어보더니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거기엔 여의도공원이 있었는데 출근 전에 한두 바퀴씩 돌던 공원을 돌지 못하고 왔다는 사실이 아쉬운 듯 잠시 입맛을 다셨다. “어, 앉아.” 국장은 쩝쩝거리는 부장에게 빨리 앉으라고 손짓했다.

“자 이렇게 해서, 어 저 그러니까 우리가 이걸 해결해야 돼요.” 국장은 했던 말을 또 했다. “어 저기 김 팀장 사모님, 저기 뭐라 해야 하나, 저 그냥 제수씨라고 해도 되겠지?” 국장은 난데없이 부장을 쳐다봤다. “네? 뭐 네, 제수씨라고 하면….” 인정이 끼어들었다. “제 이름은 김인정입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인정을 쳐다봤다. “아 네, 김인정씨. 좋습니다. 저 김인정씨.” 그때 국장의 등 뒤 창밖으로 사람들의 함성이 들렸다. “와”가 아닌 “어, 어, 어”라는 탄성. 방 안 사람들도 일제히 창밖을 내다봤는데 옥상에서 강자가 마치 뛰어내릴 듯 아래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 어 저러면 안되는데! 저러다 참말로 사람 죽겠네!”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순옥은 창 쪽으로 다가갔다. 뒤이어 박 반장이 다가오고 인정이 창가에 붙었다. “아 씨, 저 아줌마 진짜 누구 신세 조지려고 저래? 응?” 박 반장은 얼굴을 실룩거리며 창밖으로 삿대질을 해댔다. “일하게 해달라고 사정, 사정해서 청소일 해본 적도 없는 아줌마를 써줬더니 출근 첫날부터 저 지랄이야. 아우, 진짜 미치겠네.” 잠자코 있는 부장과 국장 앞에서 박 반장은 들으란 듯 강자에게 험한 말을 쏟아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을 박 반장도 모르지 않았다. 창밖에서 들리지 않는 함성을 지르는 강자를, 어쩌면 곧 뛰어내릴지도 모르는 강자를, 그래서 9시 뉴스 맨 앞머리를 차지할 뉴스에 자신의 푹 숙인 얼굴을 나가게 할 강자를, 누구도 아닌 바로 박 반장이 채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반장이 받을 불이익은 별달리 대단한 건 아닐 것이다. 자기 딸의 억울함을 만천하에 알리려는 목적을 숨긴 채 위장 취업한 강자를 알아차리기란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럼에도 박 반장은 어떤 불이익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순옥씨, 아니 내가 일 잘 설명해주고 잘 데리고 다니라고 분명히 그랬는데 뭐 하다가 저 지경을 만들었어, 응?” 말문이 막힌 채 박 반장을 올려다보는 순옥의 어깨를 감싼 건 인정이었다. “잘 모르지만 관리자님인 것 같은데, 이분께 그렇게 책임을 지우는 듯한 말씀을 하시는 건 잘못된 것 같아요.” 사람들은 다시 일제히 인정을 쳐다봤다.

“아, 자자 이러지 말고 우리 팀답게 일을 분담해서 처리해봅시다.” 부장은 박 반장과 인정의 어깨를 동시에 두드렸다. “일단 앉으세요. 앉아요.” 국장은 계속 사람들을 앉혔다. 박 반장은 ‘저 여자 뭐야?’란 표정으로 인정을 쳐다봤다. 앉으려는 박 반장과 인정과 달리, 순옥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기요, 지가 보니까 저기 위에 있는 강자씨 딸내미가 여기 무슨 프로에서 일하다가 잘린 거 같아예.” 순옥은 오른손으로 목을 베는 동작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갖고 그게 억울해갖고 그 딸내미가 아마 저세상으로 갔나봐예.” 이번에는 오른손 검지를 치켜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생각해보이소. 얼마나 억울하겠어예. 끽해봤자 서른도 안 됐을 긴데. 그런 새파란 딸내미가 갑자기 목을 매부맀다 생각해보이소. 나 같아도 피가 막 거꾸로 솟고 막 싹 다 막 지기뿌고 싶을 거 아니겠어예?”

“맞아요. 아주머니. 그러니 일단 앉아보세요.” 국장은 다시 순옥을 앉히려고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니까예 저 강자씨가 지금 저래 뛰어내리뿌겠다고 하는기 지는 이해가 간다, 이 말입니더.” “맞다니까요, 아주머니. 그런데 일단 저 위에 있는 강자씨를 내려오게 해야 하는데 지금 모인 여러분이 그걸 해야 한다는 거죠.” 국장의 말이 효과가 없자 부장이 나섰다. 이번에는 순옥을 일단 앉게 했다.

다시 인정이 끼어들었다. “제가 보니까 일단 경찰이 위에 계신 분을 내려오게 대화를 시도하고 있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알다시피 그 따님이 잘못된 선택을 하기 전까지 일했던 프로가 제 남편의 프로그램이에요. 그래서 남편이 이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된 일인지 경위를 설명하고 저분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지를 못합니다. 저 역시 남편에게 어떤 말도 들을 수 있는 상황이 못 되고요.”

그때 국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국장은 “네, 네” 하며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화를 끊었다. “아 저 경찰이 설득을 위해서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와달라고 요청하는데요, 모두 가실 수 있죠?” “가야지예, 당연히 가야지예.” 가장 먼저 일어선 순옥에 이어 인정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반장과 부장 그리고 국장 역시 일어섰다. 국장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 저 위에 계신 분 성함은 윤강자라고 하고요. 그분의 따님, 그러니까 여기에서 일했던 작가는 주미영입니다. 주미영 작가는 김 팀장 프로에서 처음으로 메인을 맡았는데 개편이 되기 전에 하차했다는군요. 저도 얼핏 기억이 납니다.” “아 주미영? 걔 알지.” 부장이 말을 받았다. “걔가 자살했다고?” 부장은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 주미영 작가에 대해 남편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결정적인 진술을 이어간 건 인정이었다. “그래요? 들은 대로 얘길 좀 해보세요. 자 앉아요, 앉아.” 국장은 사람들을 다시 앉혔다. 국장실을 나갈 채비를 하던 사람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엉거주춤. “굳이 앉아서 오래 들으실 내용은 없습니다.” 인정의 말에 사람들은 다시 엉덩이를 소파에서 뗐다. 엉거주춤. “처음 메인을 맡아서 남편도 걱정이 없지 않았는데 주미영 작가가 성실하고 무엇보다 스태프와 원만히 잘 지낸다고 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인정이 꺼낸 이야기는 주미영 작가의 자살 원인을 캐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남편인 김 팀장을 비롯해서 방송사 사람 누구도 주미영 작가가 하차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 팀장이 아내인 인정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현재로선 김 팀장이 주미영 작가의 자살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주미영 작가의 하차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부장은 메인으로서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만 어렴풋이 들었다고 시큰둥하게 말했고, 국장은 그런 얘기조차 자신은 듣지 못했고 그저 작가가 교체됐다는 것만 보고받았다고 얘기했다.

“주미영 작가가 하차한 건….” 인정의 말을 가로채고 끼어든 건 순옥이었다. “혹시 그 작가 아니라예? 새벽에 젤로 먼저 하는 프로그램예. 요래 요래 머리가 단발져갖고 얼굴도 이쁘장하고 우리 같은 청소 아줌마들한테 인사도 잘하고 하던 그 작가 아니라예?” “아 진짜, 순옥씨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봐요.” 박 반장의 무시에 인정이 발끈했다. “이분도 여기 일하시는 분이고 주미영 작가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 수도 있는데 왜 아까부터 자꾸 무시하는 얘길 하고 그러세요. 아 참, 성함도 모르고 있네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 저예? 지는 이순옥이고예, 어쨌든 간에 제 생각에는 그 작가가 그 작가 맞는 거 같아예.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피디 선생님들은 인사를 잘 안 해주거든예. 작가들도 워낙 바쁘니까 인사 잘 안 하고예. 그런데 그 작가는 새벽에 엄청시리 바쁠 긴데도 인사를 잘하더라고예. 그래갖고 젊은 처녀가 참 대견타, 그래 생각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방송이 시작되고 좀 있다가 화장실로 뛰어와갖고 막 울더라고예. 그래갖고 아고 또 피디놈이 뭐라 한 소리 했나보다 하면서 안됐다, 이래 생각하고 있는데 그날 방송 끝나고 간다 카면서 짐을 한 보따리 싸갖고 지한테 또 꾸벅 인사를 하더라고예. 그래갖고 뭘 그리 마이 들고 있냐고 물어보니까 그만뒀다고 안녕히 계시라고 이라더라고예. 그러면서 지 먹으라고 뭘 줬는지 알아예?”

사람들은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순옥의 얼굴을 주시했다. 순옥은 신이 난 듯 떠들다가 문득 자신이 너무 많이 떠들었다는 걸, 그런데 사실 그게 별것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마지막 물음에 자신이 대답할 차례였다. “순옥씨! 뭔지 빨리 말 안 하고 뭐 해요!” 박 반장은 윽박지르듯, 재촉하듯, 달래듯 순옥을 쳐다봤다.

주미영 작가가 순옥에게 준 건 식권이었다. 순옥이, 자신이 목격한 미영에 대해 내뱉은 말이 별것 아니었던 것처럼 미영이 순옥에게 준 식권 석 장도 별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은 순옥이 마침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날이었고, 순옥이 식권 석 장 가운데 한 장으로 그날 점심을 해결한 것은 별것 아닌 게 아니었다, 순옥에겐. 미영이 자신에게 있던 식권 석 장을 순옥에게, 다시 만나도 그만, 못 만나도 그만인 사람에게 준 것은 미영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영은 오지 않는 쪽을 선택했던 걸까, 오지 못하리란 걸 알았던 걸까.

“그랬군요….” 순옥의 시끌벅적한 언사를 차분히 맺어준 건 다시 인정이었다. 그리고 순옥이 끊는 바람에 못다 한 말들을 이어나갔다. “주미영 작가가 하차한 건 별다른 일 때문은 아닐 겁니다. 제가 알기로 이곳에서 작가나 다른 프리랜서들이 잘리고 하차하는 건 별다른 일이 아니니까요.” 부장과 국장은 서로를 잠시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최근에 힘들어하기 시작한 시점도 개편과 맞물려서 이뤄진 인사이동과 작가 교체 때부터인 것 같네요. 물론 정확하진 않아요. 제가 아는 한은 그렇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일 잘하던 피디가 다른 프로로 좌천되고 프리랜서들이 피디와 불화를 빚다 교체되고 그런 일이 어떤 기준이나 공정성 없이 이뤄지는 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니까요.”

인정의 말에 부장은 이의를 제기했다. “내부 사정을 잘 모르시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당황스럽네요. 이 자리는 무엇보다 그런 것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니까 그만하시죠.” “일단은예 두 분이 나가셔갖고 저 위에 강자씨한테 미안하다, 잘못했다, 사과를 하이소.” 치고 들어온 건 순옥이었다.

사람들이 순옥을 주목하기도 전부터 순옥은 말을 이어갔다. “여기 김 팀장님 사모님 말씀 하나도 안 틀려예. 지도 여기 몇 년 있었지만 지 같은 사람, 작가 같은 사람, 사람 취급 못 받고 일하는 거 사실이고예.” 박 반장은 순옥의 팔을 잡아챘다. “아니 순옥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예?” 힘이 잔뜩 들어간 박 반장의 손을 순옥이 뿌리치기도 전에 인정이 박 반장의 손목을 쳐냈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까부터.”

그때 창밖에선 다시 119 구급차의 요란한 사이렌이 들려왔다. 방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창문 밖, 옥상에 강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아이고야.” 순옥은 흐느끼며 창문으로 달려들었고 창문을 손으로 쓸어내린 뒤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순옥의 뒤를 가장 먼저 따른 건 인정이었다.

이종근

수상소감 / 두렵지만 2라운드로
이정순 제공

이정순 제공

빛이 잘 들어오는 집에서 별일 없이 사는 것이 죄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2020년은 그런 생각을 더욱 자주 하게 했습니다. 감사함으로 끝날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나의 안위가 누군가가 치르는 차별과 불평등을 희생으로 한 것이 아닐까, 두려웠습니다.
저 역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고 일상화된 차별을 겪습니다. 동시에 그런 체제를 더욱 단단히 뒷받침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응함으로써 말입니다. 그래서 글로 말하는 것은 너무나 한갓진 일이 아닌지, 다시 두렵습니다.
운 좋게도 가까스로 합격 버튼을 받고 2라운드에 진출한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두렵고 부끄럽지만 글을 통해 말하는 길을 계속 가고 싶습니다.
제 본명은 이정순입니다. 이종근은 어린 시절 죽은 오빠 이름입니다. 죽은 자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편히 쉬는 사람을 깨우는 일이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부끄러운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분들(그분들이 제 글을 읽어주시고 뽑아주셨다니!)과 <한겨레21> 관계자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신성한 노동으로 저를 키우고 믿고 바라봐주신 아버지 이홍기, 어머니 윤무출, 사랑합니다. 수상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인 남편과, 엄마가 상 탔다고 기뻐해준 아이에게 고맙고 사랑한단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소중한 가족인 시부모님과 시집 식구들에게도 감사하단 말을 하고 싶습니다. 재영, 동렬 두 사람이 없었다면 이 소설을 맺지 못했을 겁니다.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더욱 인상적인 무대를 펼치는 경연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종근(본명 이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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