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영화를 한 편 봤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2001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름을 빼앗음으로써 상대를 지배하는 마녀의 세계와, 어쩌다 그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온 10살 소녀에게 “이름을 꼭 기억하라, 이름을 잊어버리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고 조언해주는 이, 그리고 주어진 상황 안에서 고마움·미안함·걱정·의리 같은 것을 느끼고 지켜가며 결국 부모를 구하고 원래 세계로 돌아오는 주인공 소녀의 이야기. 자기 이름의 중요성, 즉 정체성에 대한 영화라는 것에 이견이 없다. 하지만 자기 이름을 잊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설정에 대해, 또 조금은 골똘해진다.
‘진정한 나’라는 관념
나를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게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라는 대목이다. 자신을 정의하는 힘은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를 둘러싼 사회, 가깝고 먼 인간관계, 교사와 반면교사, 당대의 언어와 모델들, 그리고 나의 중요한 타인들이 나를 구성하고 또 변화시킨다. “‘진정한 나’라든지 하는 것은 밟아 부숴버리고 싶은 말입니다”라는 말이 있다(우에노 치즈코·노부타 사요코, <결혼제국>, 70쪽). 인간은 부모보다 시대를 더 많이 닮고, 감정도 생각도 구름처럼 변한다. 그럼에도 내가 누구와 엮이고 무엇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지 결정하는 매일매일의 크고 작은 선택들이 ‘나’다. 말하자면, ‘자아실현’이 문제가 아니라 실현할 그 ‘자아’가 사회적 조건과 관계와 행동을 통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름을 빼앗겼기에 마녀의 지배를 당하고 그로 인해 목숨까지 위험해지는 등장인물 ‘하쿠’.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도저히 내 이름이 기억이 안 나.”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치히로’를 도울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름 자체보다 이름에 대한 추구가 중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돕는 자’라는 본질(‘이름’)이 있는 게 아니라, ‘돕기’라는 마음과 행동이 ‘하쿠’다. 친구가 준 카드 덕분에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던 ‘치히로’는, 이름 자체가 아니라 ‘치히로’라고 불러주는 친구와의 관계다. 그래서 위험에 처한 ‘하쿠’를 구하러 가기로 마음먹은 ‘치히로’의 발걸음은 이미 의연할 수 있다.
‘여성계’ 같은 것은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페미니즘의 역사가 길지 않습니다.” 최근 한 일간지 칼럼에 이런 문장이 실린 것을 보고 기시감을 느꼈다.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이고, 진지하게 화내기에는 더 중요한 일이 많아 곤란하다. 물론 페미니즘 강의로 먹고사는 나에게, 페미니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은 언제나 분석 대상이고, 또한 배움의 텍스트다. 그러나 자신이 다루는 사회현상에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을 망각한 ‘구경꾼의 지식’은 문제를 분석하기보다 문제의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인지 나는 항상 ‘여성계’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언론이나 정치권이 흔히 쓰는 말이긴 한데 당최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화자(話者)의 현실 인식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는 투사(投射)일 뿐인 경우가 많다. 여성계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다가, 한참 지나서야 서로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걸 발견한 적도 있다.
또 이런 말도 자주 듣는다. “한국의 페미니즘은 왜곡됐다.” “왜곡된 페미니즘이 아닌 진정한 페미니즘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페미니즘은 누가 갖고 있거나 발견되길 기다리는 물체가 아니라, 정확히 무엇을 왜 ‘왜곡’이라 생각하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며 적절한 타인들과 함께 토론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질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구, 관계, 토론 속에 ‘진정한 페미니즘 vs 왜곡된 페미니즘’은 더 이상 중요한 질문이 아니게 된다. 구경꾼의 지식은 중요하지 않다. 누가, 누구와 함께, 무엇을 추구하는지가 관건이다.
전희경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옥희살롱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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