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글쓰기 강의를 하나 들었다. 소설가나 시인 같은 창작자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가 아니라, 주로 과학 분야 전공자가 듣는 강의였다. 강의하는 분이 물었다. “글은 두괄식이 좋을까요? 미괄식이 좋을까요? 한번 손 들어볼까요?” 두괄식이 좋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강사가 살짝 놀랐다. 여기 있는 수강생들은 기본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이해가 높은 것 같다고 했다.
두괄식이면 안 되는 것들
나도 놀랐다. 글쓰기 책마다 첫 문장부터 승부를 보아야 한다, 두괄식으로 구성해야 글이 더 매력적이다 등의 조언이 나온다. 그 이유는 사람들 대부분이 글을 쓸 때 앞부분에 주저리주저리 내용을 늘어놓고, 할 말은 맨 뒤에 겨우 한두 줄로 붙여넣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면 호기심도 안 생기고 끝까지 읽을 힘이 안 생긴다. 그런데 이미 글쓰기의 핵심 법칙을 알고 있다니. ‘이과생이라 그럴까, 보통의 상식과 다르네’ 이런 생각을 하는데, 강사가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 두괄식이 좋지만, 반드시 미괄식이어야만 하는 글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두 회사가 합병하는 데 필요한 보고서는 미괄식인 게 훨씬 좋겠죠. 왜 합병이 필요한지, 어떤 방식으로 합병하는 게 좋은지, 그 필요성이 충분히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C라는 방식으로 합병한다’라는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그 순간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무도 안 들으려고 할 겁니다. A는 B에 유리하다고 반발하고, B는 A에 유리하다고 반발하느라 난리가 나겠죠. 그래서 모두에게 좋은 일도 최종 결론부터 말해서 날아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장기적으로 진행해야 할 일을 추진할 때, 적대관계에 있는 일을 합의할 때, 이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일을 받아들일 때와 같이 설득이 목적일 때는 미괄식으로 가야 하겠죠.”
비단 글쓰기에만 적용되는 설명이 아니라, 세상의 숱한 일을 판단하는 데도 좋은 힌트가 되는 설명이었다. 지금은 왜 그렇게 반대했는지 알 수 없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일도 있었고, 사회적 이슈가 아니더라도 회사에서, 집에서, 친구 사이에서 결론부터 말해서 망가진 숱한 일이 떠올랐다. 이런 시각으로 인터넷을 훑어보니 기사 제목도 온통 그랬다. 결론만 자극적으로 뽑은 기사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와 관계없이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판단만 내리도록 사람들을 가르고 몰아넣기에 딱 좋아 보였다.
미괄식으로 물어야 하는 일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사회에서 미괄식은 점점 힘을 잃는다. 책을 만들 때도 이런 현상이 강해진다. 첫 쪽 두 문장만 읽고 나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면 독자는 책장을 덮는다. 무조건 확실한 결론이 드러나는 장부터 앞에 배치해야 한다는 게 편집의 기본처럼 되어간다.
사람들에게 ‘인생이 두괄식이냐 미괄식이냐? 혹은 두괄식인 게 좋으냐 미괄식인 게 좋으냐?’라고 물으면 대부분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오늘 아무리 행복해도 내일 불행한 것은 싫다.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이 인생의 전부라면, 뭐 하러 열심히 살 것인가 등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인생은 여러 가능성으로 이루어졌고, 그 가능성을 충분히 탐색하는 게 좋다는 마인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통 이슈를 두고도 ‘그래서 네 입장이 뭔데?’라는 결론부터 묻는 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더 나은 가능성을 판단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미괄식으로 물어야 하는 일, 심지어 양괄식이어야 하는 일도 많을 텐데 말이다.
김보경 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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