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총선 때 녹색당 원내 진출이 확실하다는 얘기가 들려서 설레다가 개표 결과에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어, 분명 분위기 좋았는데? 나처럼 황망한 사람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한참 훑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 타임라인은 내가 선별해서 구성한 이야기라는 것을. 이후 나는 내가 구독하는 뉴스와 SNS 소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믿는 대로 본다우리는 보는 대로 믿기보다, 믿는 대로 본다. 관찰의 이론의존성을 주장한 과학철학자들과 수많은 페미니스트 인식론자가 논해온 주제다. 나는 종합편성채널 채널A의 뉴스를 믿지 않고, 아버지는 기사를 믿지 않는다. 그뿐인가. 요즘은 무엇을 믿을지 생각할 시간마저 절약해주는 편리한 시대여서, 우리 대부분이 구글이나 페이스북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것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현실은 하나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뭘 알고 모르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이 정도로 세상이 복잡하고 모호하면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냥, 안다고 치자.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나쁜 놈이 저기 있구먼.
어느 강의를 가든 “탈코(르셋)를 안 하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나오던 때가 있었다. 조금 지나자 “저는 사실 비혼주의자는 아닌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이들이 생겼다. 최근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트랜스젠더는 성별이분법을 강화하는 존재 아닌가요?”이다. 그리고 얼마 전 한 강의에서 만난 ㅂ씨에게서 ‘사이비 페미니즘 감별법’ 이야기를 들었다. ㅂ씨가 페미니즘 강의를 들으러 간다고 하자, 어떤 ‘페미니스트’들이 ‘사이비 조심하라’며 해준 이야기란다. 걱정은 진심 같았고, ‘감별’ 기준은 간단했다. 성소수자(특히 트랜스젠더)와 연대할 것을 주장하면 ‘사이비 페미니즘’이라는 것이다. ㅂ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서울지하철 노선별로 조직돼 있다고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마을 주민들에게 페미니즘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데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실패해온 나는, 내용은 둘째 치고 그 ‘간단함’에, 그리고 어쩌면 그 간단함이 한몫했을 ‘조직력’에 충격받았다. 삶은 다양하고 인간은 복잡하다. 모든 앎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그런 앎조차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믿던 걸 계속 믿게 해주는 이야기에 빠져드는 건 달콤하지만, ‘네가 뭘 알아?’라는 마음을 파고드는 건 가짜뉴스의 선동뿐이다. 겸손과 복잡성은 포기되기 쉽다. 그러나 만화 대사와 달리, 포기하면 내 기분만 편해지고 세상은 끔찍해진다.
어떤 세상에 기여하는 앎인가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이 글의 시작은 귀한 칼럼 지면을 감당하기엔 내가 세상물정에 너무 어두운 거 아닌가 하는 고민이었다. 안다는 건 어렵고 고되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나의 ‘모름’을 질책하기보다, 몰라도 되는 특권, ‘모르는 줄 몰랐음’을 부끄럽게 하는 사유다. 믿고 싶은 대로 믿지 않게 해주는 힘이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 세상물정도 결국 세계관에, 그리고 그 세계관이 안내하는 태도에 의존한다. 쓸데없이 페미니즘 공부냐며 비난하는 사람과 아직도 페미니즘 책 한 권 안 읽어봤냐고 받아치는 사람은, 서로 다른 세상물정에 밝다. 마찬가지로, 세상물정 모르고 성소수자 ‘챙기고’ 있냐고 말하는 사람과 세상물정 모르고 혐오에 가담하냐고 말하는 사람은, 살고자 하는 ‘세상’ 자체가 다르다. 나의, 우리의 ‘세상물정’은 어떤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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