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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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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문을 열면 뽀글머리 준호형이 있었다

홈리스 사진가와 27년 전 ‘봉준호의 추억’
등록 2020-02-15 13:49 수정 2020-05-03 04:29
봉준호 감독 30대 시절 모습. 한겨레 자료

봉준호 감독 30대 시절 모습. 한겨레 자료

준호 형! 오스카상 4관왕 달성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형의 영화가 놀라운 기세로 주요 부문을 석권하며 마침내 작품상까지 거머쥔 2월10일 월요일 오후 2시쯤, 저는 이번 달에도 턱없이 부족한 월세와 각종 공과금, 생활비와 활동비를 벌기 위해 편의점에서 정신없이 바코드를 찍다가 막 나온 참이었어요. 실은 그날 새벽 3시부터 아침 7시30분까지 우유 배달을 하고 지인의 부탁으로 편의점 대타 근무를 한 터라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인 채 라디오로 소식을 들었습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27년 전 형과 나의 공간</font></font>

그 순간 저는 어딜 좀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이 기억하고 있을 장소입니다. 지하철에서 내린 곳은 서울 홍대입구역, 경의선 숲길 책거리를 지나 여전히 미술학원이 많은 길로 올라선 저는 형이 다니며 단편영화 을 만들던 영화아카데미 앞에 잠시 섰다가 홍익대 정문을 지나 상수역 방향으로 걸어 작은 골목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곳엔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됐지만 27년 전 형을 처음 만난 공간들이 있었어요. 영화연구소 ‘노란문’과 영화카페 ‘16㎜’.

제가 ‘노란문’을, 그보다 먼저 ‘16㎜’를 드나든 때는 1993년 봄이었어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던 대학생활을 중단하고 방위병으로 막 근무를 시작했는데, 훈련소 시절부터 절 괴롭히던 국군기무사령부에 무척 시달리던 상황이었죠. 시도 때도 없이 불려가 같이 학생운동 하던 선배, 동료의 이름을 대라, 학생운동 조직도를 그려라, 너희끼리만 보던 내부 문건을 가져와라 등 강압적인 요구에 내몰렸습니다.

위로받을 공간이 필요했던 저는 오후 5시에 퇴근하면 학교가 있는 서울 신촌과 상권이 막 형성되던 ‘홍대 앞’을 떠돌다가 어느 골목 지하에서 ‘16㎜’를 발견했습니다. 거기서 헤이즐넛 원두커피를 홀짝이며 흑백 고전영화를 두세 편씩 보고, 문 닫을 시간에야 마지못해 밖으로 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다 같은 건물 2층 영화연구소 ‘노란문’의 샛노란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그 시절은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짧은 학생운동의 전성기가 잦아들던 때였죠. 대통령선거마저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의 완승으로 끝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전 몇 년간 끼고 살다시피 했던 철학, 역사, 정치경제학 서적을 미련 없이 헌책방에 팔아넘기고 등을 사서 읽으며 밤이면 라디오 에 주파수를 맞추곤 했습니다. 그리고 한 주에 두 번씩 진행되던 ‘노란문’의 비평분과 세미나에서 본격적으로 영화이론을 공부했습니다. 근처 여러 대학 학생들이 뒤섞여 함께하던 그 세미나의 교사는 바로 당신, 봉준호였습니다.

그때도 형은 뽀글이 파마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특유의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세미나를 이끌었습니다. 를 기본으로, 비디오테이프에 편집해 담은 같은 초기 영화을 보면서 영화이론의 개념과 세계영화사를 지루하지 않게 설명하던 형의 한마디 한마디가 아직도 잊히지 않네요.

“‘버드아이 뷰’는 그야말로 공중에 높이 떠 있는 새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촬영 기법인데, 뉴욕 맨해튼 빌딩숲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동차 추격 신 같은 데서 여전히 잘 활용되고 있죠. 여기 이 책에선 조안각이라고 번역해놓았는데….”

“자, 이 장면을 다시 한번 보면 영화 속 등장인물이 연주하는 이 트럼펫 소리, 이게 디제틱 사운드라면 연주가 끝난 뒤 나오는 이 배경음악, 이건 논디제틱 사운드겠지!”

“이 책 읽어봤어? 뭐? 불어로도 읽어봤다고? 꽤 착실하구먼.”

<font size="4"><font color="#008ABD">‘노란문’과 ‘16㎜’는 사라졌지만</font></font>

그해 형은 단편영화 한 편을 만들고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노란문’ 앞 골목길에서도 영화를 찍던 형의 모습이 기억나요. 이었던가요? ‘노란문’ 맞은편 주택 중 하나가 배우 김혜자 선생 댁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나요? 편안한 옷차림으로 쓰레기를 내놓던 그분을 몇 번 봤던 기억이 있어요. 몇 년 전 영화 를 보며, 두 사람이 오래전 가까운 곳에 따로 있었던 것을 얘기했을까, 하는 궁금함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척 재미있고 소중했던 그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6㎜’는 장사가 안 돼 호프집으로 바뀌었고, 어느 날 가보니 ‘노란문’도 문 닫을 거란 얘기가 돌더군요. 형은 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할 거라 했고, 비평분과 세미나는 형 없이 몇몇 누나와 형이 집이나 카페에서 돌아가며 발제를 하다가 결국 시들해졌어요.

꾸역꾸역 시간을 소화하며 군생활을 마쳤습니다. 학교로 돌아간 뒤 또다시 학생회와 학생운동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었어요. 캐나다로 유학을 가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방송·영화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북미에서도 형의 영화 소식은 들었습니다. 밴쿠버영화제에서 단편영화가 수상했다는 뉴스였어요. 상업영화 입봉작인 는 한국에 잠시 나왔을 때 보고 재밌다! 유쾌하다! 유니크하다! 생각했는데 주변에 영화를 봤다는 사람이 거의 없어 안타까웠네요. 이후 몇 년간 형의 영화를 볼 수 없어 암중모색 중이겠구나 했습니다. 다음에 들려올 소식이 ‘영화평론가’ 봉준호가 아니길 바랐어요. 그리고 마침내 이 비범한 느낌으로 곁에 왔습니다. 캐나다, 미국 친구들에게 영화 속 대사를 어떻게 영어로 옮기면 그들도 같이 웃을까 생각했습니다. 이 개봉했을 무렵, 이런 멋진 알레고리를 형상화한 형에게 저 혼자 부를 호(닉네임)도 하나 만들었어요. 쾌할 쾌자 ‘쾌물’이라고.

전 다시 한국에 돌아와 강의도 하고 방송일도 하며 지내지만, 형 영화에도 등장하는 홈리스(노숙인)로 삽니다. 광화문광장에서 사진도 찍고요. 형이 영화로 세계를 그리는 사람이라면, 전 그저 제가 사는 방식과 활동으로 ‘아르스 비벤디’(행복하게 사는 법)를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홈리스 영화 강의 부탁해도 될까요</font></font>

형에게 하나 부탁하고 한 가지 포부를 밝히며 인사하려고 합니다. 준호 형! 언제든 한가할 때 사진과 영상을 공부하며 가난하지만 역동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나가는 홈리스들 앞에서 형의 영화 이야기 한번 들려주시겠어요? 한참 뒤에라도 좋습니다. 그리고 제 포부란 건, 앞으로 형이 만들 영화 어딘가에 공간을 가로지르거나 한구석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어야 할 홈리스 한 사람이 필요하다면 꼭 오디션으로 뽑아주세요! 제가 반드시 그 자리에 갈 테니까요. 선발될 자신이 있거든요! 쾌물 봉준호 감독님! 할리우드에서 남은 일정 즐겁게 보내고 그곳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될 어록도 많이 남겨주세요. 그리고 빛나는 오스카 트로피 한 다발을 가슴에 안고 멋지게 돌아오세요!

영화 동아리 ‘노란문’ 후배 겸 광화문 희망사진사 이상훈 드림
<font size="2">*이 글을 쓴 이상훈씨는 한때 봉준호 감독과 작은 인연이 있는 의 정기 구독자입니다. 은 독자와의 소통, 독자의 참여 확대 차원에서 이 글을 부탁해 게재합니다.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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