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던 것들이 더 이상 반짝이지 않지만 그 대신 모든 게 또렷해지는 때가 있다. 해가 떴을 때. 9년 전 등단한 시인 황인찬은 딱 그렇게 떠올랐다. 화려한 산문체, 휘황한 은유와 거리를 두고서 최소한의 언어, 간명한 형식으로 시적 순간을 놓치지 않는 각별한 시재였다. 황인찬은 2012년 첫 시집()으로 24살에 최연소 김수영문학상을 받고, 두 번째 시집()까지 모두 3만 부를 훌쩍 넘는 판매 기록을 세웠다.
이런 천연하고 사랑스러운 언술 때문이다.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시” 촌철 심쿵! 황인찬의 세 번째 시집 (창비 펴냄)에 담긴 시 ‘레몬그라스, 얌꿍의 재료’의 한 부분이다. 타이 음식 얌꿍 같은 먹을 거, 놀 거를 포함해 일상과 일상어는 지체 없이 시가 된다. “파란 하늘 아래 푸른 언덕이 그려진 그거” “무작위로 자연을 소환하는 윈도우 잠금화면”(‘화면보호기로서의 자연’)이 생생한 시어가 되니까. 꿀 빠는 여름 오후, 왜 영혼 없이 말하느냐고 누가 물어서 비로소(?!) “내 영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밤” 역시.
“문을 열고 나가면 아는 것들만이 펼쳐져 있는데, 문을 열고 나가면 모르는 일들뿐이라니/ 그것은 네가 어느 저녁 의자 위에 올라서서 외친 말이다/ 나는 네가 의자에서 떨어지면 어쩌나// 그것만 걱정했고// 그런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고,/ 이제는 일상 말고는 쓸 수 있는 것이 없었다”(‘식탁 위의 연설’)
황인찬의 시는 투명하게 읽힌다. 겉과 속이 같은 시. 그래서 철문 대신 유리문으로 통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아무리 조심히 문을 여닫아도 뒤에 누군가 있어 부딪칠지 모르는 철문에 비해 유리문은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기쁨은 놀라움과 안심이 겹쳐질 때 만들어지고” 이 책은 시 읽는 기쁨의 조건으로, 일상이 시가 되는 놀라움과 의뭉스러운 데 없는 안도를 모두 갖추었다.
투명하게 읽힌다는 건, 시험문제를 풀듯 무슨 의미나 메시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례적으로 많은 수의 독자에게 가닿은 이 시인은 “메시지를 던지는 건 정말 의미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메시지를 던지거나 주워 담으려는 조급한 마음들에게 그가 권한다. 오히려 물러설 것을. “직전에 멈추지 않으면 안 돼요/ 멈추지 않으면// 다 끝나버리니까”(‘이것이 나의 최선, 그것이 나의 최악’)
시집의 제목 는 1959년 발간된 전봉건의 첫 시집 이름과 똑같다. 전봉건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다. “어째서 그를 가장 사랑하느냐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이유 같은 것은 언제나 나중에 붙는 것이다.” 아, 이유나 의미를 ‘모르고 나서부터’ 시 읽기는 정말 즐거워진다. ‘모른다고 말하는 황인찬의 시가 그래서 매혹적’(신형철)인 것이다. 의미가 딱딱 정해진 안정적인 세계에선 새로운 의미를 만나기 어렵다. 추천사를 쓴 김현 시인은 이 매혹과의 재회를 축하하며 글로 아주 폭죽을 터트린다. “이토록 무게 없이 누적되는 시, 직전에 멈추는 시, 뜻이 없고자 하는 시, 생과 물의 동반자인 시, 큰따옴표로 작동하는 시, ‘봉건적인 은유’를 떠나보낸 시, 이토록 동시에 녹음된 시.”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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